▲ 지난 12일 박근혜 전 대표가 이번 당의 공천을 두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럼에도 정치권은 모두 ‘박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다. 친이그룹의 대대적 숙정에 대해 친박그룹이 어떻게 반격할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는 탈당과 잔류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신중 모드’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신들을 모두 이끌고 탈당을 전격 결행하든지, 아니면 탈락한 친박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기사회생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당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다음’을 도모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과연 박 전 대표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한나라당의 친박그룹 의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난 2월 13일, 4·9 총선 공천의 하이라이트였던 영남권 심사 발표에서 김무성 김재원 의원 등의 친박 성향 후보들이 대거 탈락하자 심한 배신감과 함께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탈락 후보들은 이구동성으로 ‘청와대의 뜻이 개입된 기획공천’이라든지 ‘특정 인사의 호불호에 의해 결정된 감정공천’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안강민 공심위원장과 당 지도부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회동을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전에 이미 당 안팎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핫 라인으로 당의 핵심실세와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공천을 막후에서 조종한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공천심사과정을 지휘하는 A 씨가 자신에게 밉보인 영남권 인사들을 여지없이 잘랐다’라든지 ‘특정 고교 인맥들만 챙겼다’라는 뒷말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친박그룹이 저렇게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또한 일부 친박 의원들은 이번 공천에 대해 “지난해 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 사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의원들은 모두 탈락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번 공천이 다분히 감정적이고 보복적인 것이었다고 흥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공천 결과를 두고 ‘친박그룹이 넋 놓고 있다가 당한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이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의 책임이 크다’라는 평가도 계속 나온다. 그가 공천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보스’로서 자신의 측근을 보호하려는 끈끈한 의리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물에 떠내려가는 측근들을 향해 안타깝게 손만 흔들 뿐 한 명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무기력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는 대략 세 가지 근거가 있다.
먼저 박근혜 전 대표가 너무 ‘순진했다’라는 평가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월 내내 공천 일정과 이방호 사무총장의 ‘40% 물갈이’ 발언으로 친이그룹과 초미의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가 지난 1월 23일 이명박 대통령과 전격 회동을 가진 뒤 만족감을 표시하며 ‘결과를 기다리겠다’라며 한 발 물러섰는데 그것이 결국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악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과의 회동 직후 박 전 대표는 “(이명박 당선인께서) 당에서 원칙과 기준을 갖고 공정하게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했고, 저도 거기에 전적으로 공감했다”며 이 대통령과 ‘공정 공천’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천에도 신뢰가 구축됐음을 공개 선언했다. 이는 인수위원회의 헛발질과 함께 공천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이명박 당선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두 사람의 회동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여전히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박 전 대표가 이례적으로 ‘만족감’을 표시하고 계파 의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정도였다면 분명히 양자간의 ‘이면합의’가 있었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당시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에게 핵심 측근의 공천 보장 등을 약속했다는 것이 이면합의의 유력한 카드였다.
하지만 그 뒤 이규택 한선교 의원의 공천 ‘1차 학살’에 이어 김무성 김재원 의원 등의 영남권 2차 학살이 연이어 터지자 박 전 대표는 ‘뒤늦게’ 공천의 불공정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천 결과가 대부분 발표된 뒤 “말도 안 되는 기막힌 일이 비일비재했고, 이렇게 잘못된 공천이 있을 수 있나”라며 사실상 ‘이-박’의 신뢰가 깨졌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런 화합이라면 당의 화합도 없다”라며 탈당 등을 시사하며 이 대통령을 압박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그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게 중론이다. 이는 ‘순진한’ 박 전 대표가 친이그룹이 주도한 공천 학살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대응책을 거의 강구하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정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물론 박 전 대표가 계파정치를 배격한다며 옛날식의 계보의원 챙기기를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회동을 통해 공천 합의를 했다고 해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대비했어야 옳았다. 공천 심사가 본격화되면서 여의도에 ‘살생부 리스트’가 떠돌아 다녔지만 박 전 대표는 전혀 공개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만약 박 전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 스타일처럼 대구로 내려가 공천에 대해 갈등 국면을 조성했더라면 친박그룹의 재결집을 통해 상당한 세를 형성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했던 대응이라곤 이규택 의원 등이 예상과 달리 날아가 버리자 그제서야 불공정 공천이라며 대응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표적인 늑장대응이자 뒷북치기였다”라고 말했다.
친이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어차피 이번 공천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공심위(공천심사위원회)가 정밀 심사를 하며 예정된 시한을 훌쩍 넘긴 측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공천 결과 발표를 최대한 늦춰 저쪽(친박그룹)에서 조직적인 대응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일괄 발표를 하지 않고 시차를 두며 조금씩 발표한 것도 탈락자와 비 탈락자 간의 공동 대응을 막기 위한 전략적인 접근이었다. 현재로서는 친박 진영이 탈당을 한다고 해도 이미 공천을 받은 후보들이 그 같은 강수에 동참할지 미지수라는 점에서 탈락-비탈락자 분리작전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공천 쓰나미’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이상,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의 회동을 너무 믿었던 것은 ‘순진했던’ 대응 방식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친이그룹의 공천 학살에 대해 정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던 점과 그들의 지공·분리 작전에 휘말린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공천 쓰나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이 모든 악수들을 만회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차피 이번 공천 파동은 박 전 대표가 대권으로 가는 소규모 전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번 파동으로 박 전 대표는 자신의 군마를 많이 잃어버려 ‘군소 대권 후보’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탈당과 함께 정계개편의 상수로 작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 박 전 대표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박 전 대표가 이미 공개석상에서 이 대통령과의 신뢰가 깨졌다고 공표한 이상 탈당이라는 극한의 상황까지 가는 경우를 상정했을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선택’이다. 친박 진영에서도 “(신뢰가 깨진 게) 벌써 몇 번째냐. 두 번 다시 속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치의 명분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박 전 대표의 성향상 ‘더 이상 같은 배를 탈 수 없다’라고 판단하면 즉시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웬만해선 최악의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남권 공천 학살이 있은 뒤 공식적인 대응은 표명하고 있지 않지만 그 전에 ‘당의 화합이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말한 점을 두고 보면 탈당 등의 시나리오도 생각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의 한 핵심 측근은 이에 대해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박 전 대표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를 넘어서 수족까지 다 자르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탈당 카드도 접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 대통령과 등을 돌리고 싶어 하지만 쉽게 헤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가 측근들을 우르르 몰고 당을 박차고 나갈 경우 “계파정치를 배격하겠다고 한 사람이 계파정치의 구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이 그에게서 등을 돌려 계파 이기주의로 몰아간다면 박 전 대표의 ‘과격한’ 정치적 선택도 쉽지 않게 된다. 나가지도 못하고 눈뜨고 계속 당할 수도 없는 박 전 대표. 과연 그는 어떤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먼저 박 전 대표가 ‘이번 게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별로 없다. 후일을 도모하자’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여당 내 야당의 수장으로 남아서 대권을 향한 지난한 길을 가는 방법이 있다. 이는 최근 공천에서 탈락했던 유기준 의원이 말한 대목에서 그 단초가 엿보인다. 유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한 뒤 박 전 대표에게서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약 공천에서 탈락한 그의 측근들이 무소속 돌풍을 일으켜 다시 당으로 돌아올 경우 당에 남아 있던 친박 세력과의 재결집을 통해 재기를 도모해볼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로선 이 카드가 탈당의 부담을 떨치고 당내 투쟁을 통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대응 방법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어떤 카드를 빼들더라도 그 파괴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친박 세력이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지 못한 자의 미묘한 입장 차이 때문에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도권에서 탈락한 친박 의원들의 경우 무소속 연대를 통해 각자도생할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영남권에서 탈락한 후보들의 경우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자유선진당의 품에 안겨야 조직적으로 친이그룹에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미 공천을 받은 친박 의원들의 경우 여당 프리미엄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탈락한 후보들과 함께 보따리를 싸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친박그룹의 조직적 대응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공천 파동이 무엇보다 박 전 대표에게 뼈아픈 것은 친박 세력들이 대거 잘려나가면서 그가 한나라당의 가장 확실한 차기 대권주자라는 프리미엄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그가 꺼내들 비장의 카드는 과연 무엇이 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