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10월9일 여야영수회담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왼쪽)와 김대중 대통령. | ||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진영이 DJ 끌어안기에 나섰다. DJ는 이 후보에게 최대 정적이다. 그러나 DJ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채 권좌에서 물러날 시기만 기다리고 있고, 이 후보는 가장 집권이 유력한 대선후보다. 이 후보가 ‘적과의 동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대선승리에 연착륙을 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게임이다.
DJ가 이 후보의 집권을 방해하지 않도록 중립지대에 가둬놔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후보가 DJ를 끌어안아야 된다는 논리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이 후보의 한 측근 의원은 “대통령은 아무리 힘이 떨어져도 대통령”이라면서 “대통령이 누구를 당선시킬 수는 없지만 특정 후보의 집권을 방해할 힘은 언제든지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97년 대선에서 YS가 DJ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면서 “이제 DJ에 대한 공격은 그만두고, 이 후보가 DJ와 화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DJ가 만약 절대로 이회창이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굳힐 경우 대통령으로 이 후보에 상처를 입힐 카드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서 “이 후보가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점을 이 후보와 만나 수차례 주지시켰으며, 이 후보도 충분히 이해를 했다고 전했다.
최근 이 후보 진영의 DJ에 대한 구애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그 첫 번째가 지난 14일 터졌던 최규선씨의 노벨상로비 문건 사건이었다. 한나라당은 대정부질문과 대변인 성명을 통해 강하게 DJ를 압박했으나 이 후보는 돌연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대정부질문에서 로비설을 강하게 제기했던 이재오 의원을 나무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의 노벨상로비 공세는 하루 만에 끝났다.
이 후보는 또 DJ의 동교동 사저와 아태재단에 대한 공격도 자제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최근 들어 한나라당은 동교동 사저와 아태재단에 대해 전혀 공격하지 않고 있다. 이 후보는 핵심당직자들에게 “권력 비리에 대한 비판은 대선전략과 함께 적절히 하되, 절대로 대통령의 신상이나 가족 문제를 깊이 건드리지 말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헌법 90조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법이 없어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이 후보는 관련법을 제정해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88년 노태우 정부는 이 법을 제정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한 법이라는 비판이 대두됐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과 함께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자신의 장래가 불안해 법 제정을 서둘렀다는 말도 있었다.
사실상 ‘상왕’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법은 이같은 국민들의 비판과 전·노 두 전직대통령의 갈등으로 유명무실하게 운용되다가 89년 3월 없어졌다. 이 후보가 상당한 비판이 예상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의 제정을 추진하는 것도 DJ 끌어안기의 한 전략이다. 이 후보의 한 핵심측근은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달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최근 “집권하면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수차례 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민주당이 믿지 않고 있다는데 이 후보의 고민이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이 후보가 야당총재 시절 수없이 주장해왔던 정치보복금지법 제정 주장을 철회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집권이 가장 유력시되는 야당의 대선후보가 정치보복금지법 제정 주장을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갑자기 없던 일로 했다는 것은 집권세력들에게는 엄청난 심적 압박이 아닐 수 없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집권이 확실시되니까 그동안 자기가 했던 말을 뒤집고 있다”면서 “사실상 정치보복을 하겠다는 뜻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 후보측 설명은 다르다. 당내 율사는 물론 법조계에 정치보복금지법 입법을 문의한 결과 “법제화에는 위헌의 소지가 많다”는 의견이 다수였다는 것이다. 범죄를 정치보복 금지라는 이름으로 덮어둘 수 있느냐는 것이 법제정 반대의 핵심이었다. 구체적인 법안 검토과정에서 정치보복 금지의 수준과 보복 금지에 따른 법의 형평성, 역차별 문제가 제기됐다. 정치보복 금지 대상만 해도 전직대통령과 그 가족에 한정해야할지, 경쟁후보를 포함시켜야할지 주장이 분분했다.
이 때문에 이 후보는 자신의 정치보복 금지 공약을 명시해줄 뭔가가 필요했다는 것이 이 후보측 사람들의 얘기다. 그 와중에 나온 것이 바로 국가원로자문회의법 제정이다. 한 측근은 “국가원로자문회의가 생기면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된다”면서 “이 후보가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이 법 제정으로 확실하게 하겠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또 “조만간 이 후보가 정치자금적 성격의 돈에 대한 과거불문 선언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후보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 DJ와 독대를 요청한 것도 정치보복 금지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 어떤 선언이나 공약도 DJ가 믿지 않으면 그뿐이기 때문에 이 후보는 DJ와 직접 만나 자신이 정치보복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생겼다. 마침 북한 핵문제가 터지자 이 후보는 이를 계기로 청와대에 단독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청와대가 이 후보와의 단독면담보다는 노무현 정몽준 권영길 이한동 등 여타 후보들과 함께 만나는 6자회동을 제의하자 이 후보측은 반대입장을 분명히했다. 이 후보측은 “국정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원내 제1당 후보가 단독으로 만나 북한 핵문제에 대한 초당적인 협력기구 구성과 정보공유시스템 등을 논의해야 한다”면서 “6자회동이 될 경우 실질적인 내용이 없이 그냥 사진찍는 행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회동은 물론 북한 핵문제에 대한 초당적 대처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 후보의 생각은 DJ와의 단독회담에 있었다. 이 후보의 한 핵심측근은 “이 후보는 청와대에서 DJ와 단독으로 만나 집권할 경우 권력형·친인척 비리, 공적자금 비리, 97년 대선잔여금 등에 대해 등에 칼을 꽂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이 후보는 나아가 구속중인 DJ 두 아들에 대한 특별사면까지도 제의할 생각이었다고 이 후보의 한 핵심측근이 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깊숙이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 후보와 DJ가 공개되지 않는 자리에서 단 둘이 만나 정치보복과 대선공정관리를 매개로 대타협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이 후보측의 전략이었다.
이 후보의 DJ 구애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권철현 후보 비서실장이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핫라인을 뚫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정치 정적이었던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선을 앞두고 벌이는 대타협은 새삼스럽게 정치는 살아있는 생명이자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김일송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