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베리 브리티시 호텔’. 런던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투숙한 세계 부호들의 천태만상을 속속들이 소개하고 있다.
혹시 5성급 호텔에 묵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미니바에 들어있는 과자나 음료수를 먹고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체크아웃을 한 적이 있는가? 만일 실수였든 고의였든 이런 경우에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체크아웃시 망신을 당하거나 혹은 호텔로부터 추후에 요금을 청구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돈 몇 천 원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일 슈퍼 리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경우 미니바는커녕 호텔 비용 전액을 지불하지 않고 유유히 호텔을 빠져 나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 비용이 수백만 혹은 수천만 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런던 하이드파크 남쪽의 나이츠브리지에 위치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영국의 3부작 다큐멘터리인 <베리 브리티시 호텔>에서 소개된 세계 부호들의 천태만상을 보면 극심한 빈부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양극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다린 오리엔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라고 하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급 호텔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상류층과 빈곤층이 나란히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호텔에 묵는 VIP 손님과 호텔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다.
<베리 브리티시 호텔>에서 소개된 부자들 가운데는 중동의 왕족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익명의 한 공주에게는 괴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여름이면 무더운 사막의 열기를 피해 런던으로 휴가를 떠나오는 그녀는 보통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그 이상을 호텔에서 묵고 가곤 했다.
공주가 이 호텔에 묵으면서 하루에 쓰는 돈은 무려 2만 파운드(약 2800만 원)가량. 사정이 이러니 공주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VIP 톱10 고객 가운데 한 명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가령 ‘큰손’ 고객인 만큼 공주가 도착할 때쯤이면 호텔 전 직원들은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마치 군부대 작전에 돌입한 듯 모든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변덕스런 공주의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서 24시간 애를 먹곤 한다. 가령 지난해 여름에는 대형 트럭에 실려온 공주의 200개의 짐가방을 나르기 위해 호텔 직원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했었다.
공주가 묵었던 스위트룸의 가격은 1박에 7000파운드(약 980만 원)였다. 이 객실은 공주의 요구에 따라 특별히 개조되었으며, 방 하나는 공주의 자녀들을 위한 놀이방으로 새롭게 수리됐고, 공주의 침실에는 암막 블라인드가 추가로 설치됐다.
하지만 공주에게는 치명적인 습관(?)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이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호텔 직원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주기 힘든 습관일지도 모른다. 다름이 아니라 ‘외상 습관’ 즉, 호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지난해의 경우에는 심지어 20만 파운드(약 2억 8000만 원)의 청구서가 쌓여 있는데도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은 채 유유히 호텔을 빠져 나가기도 했었다.
유서 깊은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전경. 총지배인인 제러드 신테스는 “고객의 요구가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더라도 합법적인 한 모두 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호텔의 지배인인 로만 그리스하버는 “특정 왕족들을 상대하면서 배운 수많은 교훈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바로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심심치않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슈퍼 리치들의 경우, 대부분 신용카드 정보를 남겨두길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짜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 가능한 고객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밀린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호텔 입장에서는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라고 그리스하버는 말했다. 특히 호텔 업계에서는 ‘크렘 드 라 크렘(최고 중의 최고)’으로 여겨지는 중동의 왕족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더욱 까다로운 일이라고도 말했다.
지난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떠난 공주에게 장장 9개월 동안 이메일과 전화로 대금 지불을 요구한 끝에 가까스로 전액을 결재받는 데 성공했던 호텔 측은 그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당했던(?) 호텔 측은 그 다음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공주의 투숙 기간이 끝나갈 무렵부터 수행원 가운데 누가 비용 결재를 담당하는지 알아낸 후 제때 비용을 지불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던 것.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번에도 공주는 숙박료를 지불하지 않은 채 호텔을 빠져 나갔고, 불쌍한 지배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스하버는 “그런 손님들에게는 ‘이대로 호텔을 나가실 순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경우 작은 소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반 손님들의 경우에는 어떨까. 만일 숙박료를 외상으로 달아놓고 떠날 경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해 그리스하버는 “절대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사실 이런 ‘외상 숙박’은 이 호텔에 투숙하는 부자들의 다양하고 괴이한 습관들에 비하면 약과일지도 모른다. 가령 호텔에 투숙했던 새 신부였던 한 손님은 파티를 위해 코끼리 한 마리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미국인 여성 고객은 보스턴으로 급히 모유를 배송해 달라는 별난 요구를 했다. 사업가였던 이 여성은 당시 갑작스레 런던에서의 일정이 며칠 더 늦춰지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미국에 있는 갓난아기를 위해 모유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었다. 호텔 측이 이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급 호텔은 사회의 상류층과 하류층이 공존하는 곳이란 점에서 이들 사이의 간극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이 둘이 서로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세탁실에서 일하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주 노동자인 막심(26)의 경우에는 시간당 7파운드 20센트(약 1만 원)를 벌고 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손님들의 양말 세탁 및 다림질이다. 양말 한 짝의 세탁비는 6파운드 50센트(약 9000원). 그리고 익스프레스 서비스의 경우에는 13파운드(약 1만 8000원)다. 이는 막심의 시급은 물론이요, 보통 새 양말을 한 켤레 사는 비용보다도 비싼 것이다.
고급 호텔은 상류층과 하류층이 공존하는 곳이다. 세탁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 시간당 약 1만 원을 번다.
한 번은 이런 손님도 있었다. 트렁크 두 개에 가득 들어있는 옷을 전부 세탁한 후 다림질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이 옷들은 이미 깨끗하게 세탁과 다림질이 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말끔하게 비닐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막심은 고객의 요구에 따라 멀쩡한 옷들을 전부 다시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했으며, 이렇게 한 세탁 비용은 총 1500파운드(약 200만 원)였다. 또 어떤 때는 라벨도 떼지 않은 새 명품 옷들이 세탁실로 오기도 했다.
음식을 낭비하는 경우 역시 비일비재하다.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이 들려준 에피소드는 놀랍기 그지 없다. 한 번은 싱글룸에 묵었던 고객 한 명이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주문했었다. 그 손님이 주문한 음식의 총 가격은 1000파운드(약 140만 원)였으며, 결국 대부분은 입도 대지 않아 그냥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했다. 이에 대해 호텔의 한 직원은 “아마 메뉴에 있는 모든 음식을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렇다면 손님은 늘 옳은 걸까? 이렇게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요청을 하는 데도 말이다. 이에 대해 총지배인인 제러드 신테스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인 한 우리는 고객의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텔 직원들 역시 손님들의 이런 요구에 묵묵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지 그들은 그만큼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막심은 “누군가는 부자고 누군가는 가난하다. 로또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어쩌겠는가?”라고 체념했다. 또한 불만도 없다. 이들은 오히려 두둑한 팁을 주는 손님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가령 컨시어지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직원의 경우에는 손님의 요청에 따라 레스토랑 예약을 변경해준 대가로 200파운드(약 28만 원)의 팁을 받기도 했다.
도어맨인 다빈 에드워즈 역시 마찬가지다. 쾌활한 성격의 에드워즈는 서인도제도의 세인트루시아 섬에서 온 이주 노동자로 한때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운동선수였다. 부상 후 선수 생활을 포기했던 그는 현재 ‘만다린 오리엔탈’에서 발렛 주차를 담당하는 업무를 보고 있다. 그는 억만장자들의 슈퍼카들(맥라렌, 롤스로이스, 페라리, 벤틀리 등)을 대리 주차하면서 제작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차들은 15분 동안 타고 있으면 허리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많은 슈퍼카 가운데는 1년 넘게 주차되어 있는 것들도 많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호텔을 주차장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어린 시절 동생인 마가렛 공주와 함께 호텔 무도회장에서 댄스 교습을 받았을 정도로 유서 깊은 ‘만다린 오리엔탈’은 가장 영국적인 호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름이 아니라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 610명 가운데 80% 이상이 외국인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총지배인인 신테스와 컨시어지 책임자인 프랑수아-사비에르 지로토는 프랑스 출신이며, 그리스하버는 독일 출신이다. 이밖에 이벤트 책임자는 아일랜드 출신이고, 조식 매니저는 폴란드, 세탁 책임자는 슬로바키아 출신이다. 그야말로 가장 영국적인 호텔에서 영국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불만들이 없다. 외국인 손님이나 이방인 직원 모두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 서로에게 윈윈이기 때문이다. 신테스 총지배인은 중동 공주의 연체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공주가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는 공주의 집이다. 우리는 공주를 좋아하고, 공주도 우리를 좋아한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