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 | ||
한나라당이 18대 총선을 치르면서 급격한 세력 재편 과정을 겪고 있는 가운데 여권 핵심부는 이명박 정권을 강력하게 지원해줄 새로운 추동그룹 만들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8월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재오 의원이 이끄는 당내 친이(친 이명박) 그룹(전체 의원 128명 중 62명)이 친박(친 박근혜) 그룹(42명)에 수적 우위를 확보, 이명박 대선 후보를 탄생시킨 바 있다.
하지만 18대 총선 과정에서 친이 그룹의 ‘돌격대장’들(이재오 이방호 의원 등)이 뜻하지 않게 낙마하자 여권 내부에서는 그들을 대체할 ‘신주류’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친이 그룹도 총선을 거치면서 분화를 거듭해 신주류의 밑그림을 그리려는 여권 핵심부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권의 ‘신주류 만들기’는 7월 전당대회와 멀리는 대권 후보 경쟁 구도를 내다볼 수 있는 척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은 두 사람이 지난해 8월 대선후보를 놓고 치열하게 맞붙었던 경선 이후부터 나온 ‘영원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만약 친박 그룹 관계자들이 위의 질문을 받는다면 거의 전부가 “노(NO)”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통령에게서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과 그 존재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 대통령에 대한 친박 그룹의 불신은, 4·9 총선 공천이 끝난 뒤 박 전 대표가 “우리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고 일갈할 때 그 정점에 달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왜 그리 중요할까. 이는 ‘이 대통령의 박 전 대표 인정 강도가 향후 여권의 권력 재편과도 밀접하게 맞물리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친이 그룹을 이끌던 이재오 의원의 공백으로 여권 핵심부는 그를 대체할 신주류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이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박 전 대표에 대한 정치적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의 수를 따져보기 전에 두 사람 간의 신뢰 관계를 잠시 되짚어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치열한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치러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박근혜 전 대표 측이 BBK 의혹 사건 등과 관련해 끊임없이 네거티브 공세를 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질려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같은 당 소속인데도 죽기 살기 식으로 펼쳐지는 네거티브 공세에 마음도 많이 상했고 박 전 대표에 대해서도 내심 실망을 많이 했다는 것. 이 대통령은 경선이 끝난 뒤 이에 대해 “지난 경선 과정에서 참 섭섭하고 ‘야 이 사람들이 이럴 수 있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경선이 끝나도 못 잊을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 경선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그 마음이 눈 녹듯 녹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 말을 그대로 풀이해보면 경선이 끝난 뒤 박 전 대표에 대한 불신은 깨끗하게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나라당의 한 친이 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진정한 국정의 파트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세 가지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치열한 네거티브 공세를 거치며 승리했다. 당시 그는 사석에서 박 전 대표에 대해 심한 분노를 여러 번 표시하며 매우 서운해 했다. 물론 그 뒤 ‘깨끗하게 잊었다’라고 몇 번 말은 했지만 이 대통령 정도의 나이(67세)가 되면 그런 일은 끝까지 잊지 않게 된다. 특히 자신이 네거티브에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하면 쉽게 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이 대통령의 독특한 ‘자존심’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까지 오로지 자신의 MB(이명박 대통령 이니셜) 브랜드 하나만으로 대통령까지 올랐다. 그런 강한 자신감은 박 전 대표가 아무리 뛰어난 정치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벽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의 참모들 대부분은 박 전 대표를 국정 파트너로 감싸안기보다 이 대통령의 위상을 저해할 ‘잠재적 위험인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참모들의 이런 부정적 기류는 이 대통령의 의중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자신의 ‘복심’과 달리 여러 차례 박 전 대표를 국정 파트너로 삼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정치도 이제는 권한과 책임이 독점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본다. 권력을 야합적으로 나누어 갖는다기보다는 생산적인 분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일종의 ‘립서비스’(lip-service:말을 그럴듯하게 해서 상대방이 공감하기 좋도록 하는 것)라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 측에서도 이 대통령에 대해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단적인 예가 당선인 시절의 일이다.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의 국무총리 임명을 한때 고려했다. 그런데 당시 MB 측 한 핵심관계자는 “그때는 진정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총선이 끝나고) 다시 관계 회복을 하려면 전부를 내준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박 전 대표에 대한 불신은 그 뒤 4·9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이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공천 과정을 보고 받고 지시를 내렸다”라는 말까지 나온 상황에서 친박 그룹의 대거 낙천은 누가 봐도 이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의 총리 기용 불발과 친박 그룹의 공천 대거 탈락 등의 정황을 보면 이 대통령은 여전히 지난해 8월의 ‘경선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박 전 대표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까지도 안 돼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속내를 ‘뒤늦게’ 파악했던 박 전 대표는 편파적 공천 결과와 관련해 “우리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며 이 대통령과 공개적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 박근혜 | ||
먼저 이 대통령이 친박 그룹의 대거 약진이라는 총선 결과를 100% 수용한다면 향후 여권 신주류는 친박 그룹 일부가 참여하는 탕평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을 인정해 일종의 권력 균점을 이룬다는 것이다. 차기 당권 경쟁에서도 친박 그룹의 김무성 의원 등을 적극 중용해 계파를 넘어서는 ‘광폭정치’를 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기존의 권력지도가 백지가 된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난 한 중진 의원은 한 언론에서 “그런 선택은 않을 것 같다. 총선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차라리 자유선진당이나 민주당과의 협력을 택할 자세더라”고 말한 바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시그널이 없는 이상 당을 뛰쳐나간 친박연대의 복당 등도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 전망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친박그룹 부활’이라는 총선 민심을 완전히 거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박 전 대표의 실체를 부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할 것이란 게 지금으로선 가장 현실적인 선택으로 여겨진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여권 신주류는 ‘범(汎)친박 그룹’으로 알려진 임태희 의원 등과 같은 ‘비둘기파’(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을 인정해 국정 파트너로서 같이 가자고 주장)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범주류라 할 수 있는 전재희 박진 나경원 의원 같은 이들도 중용될 것이란 말도 나온다. 이들은 모두 ‘친 이상득’ 성향의 의원이란 점에서 일단 박근혜 전 대표 세력과 당권·대권을 놓고 대립하는 ‘매파’인 공성진 진수희 의원 등 이재오 의원 계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통령으로선 친박 그룹의 도전으로 시작될 18대 국회 초반을 비둘기파 중용으로 돌파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점점 차기 당권 주자로 탄력을 받고 있는 정몽준 의원 위주의 신주류 짜기도 검토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 의원이 아직 ‘당심’을 얻기에는 세가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오 의원과 라이벌 관계였고 친이 그룹이 아니고 독자세력이었던 홍준표 의원이 중용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김형오 의원 카드도 국회의장과 당권 사이에서 검토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진정한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지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친박 그룹과의 갈등을 각오하고 여권 신주류를 친이 그룹 돌격대 위주로 짜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이재오 의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성진 정두언 의원 같은 재선그룹에게 ‘얼굴마담’을 맡긴 뒤 이 대통령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방법도 있다. 또한 이번에 새로 등원하는 서울시청과 ‘안국포럼’ 출신 인사들(백성운 이춘식 권택기 김용태 당선인 등)도 이명박 정부의 전위대로서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정두언 의원이 ‘좌장’으로서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권력 새판짜기는 박근혜 전 대표를 ‘얼마나’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고집’을 꺾고 박 전 대표와 ‘내키지 않는’ 손을 잡아야 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친이 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번 총선 결과는 지난해 경선 때부터 계속돼온 이명박 캠프의 박근혜 고사작전이 완전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잠재적 권력 침해 요소인 박 전 대표의 부상이 결코 탐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국민들은 두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이명박 정부 초기의 오만에서 온 자업자득이다. 이제 이 대통령은 미우나 고우나 박 전 대표의 실체를 인정하고 정밀한 관리를 할 때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최근 청와대 정무라인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협치(協治)모델’이다. 이는 이번 총선을 통해 한나라당의 체질을 ‘이명박 당’으로 탈바꿈하려던 이명박 대통령의 애초 구상이 많이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반대로 ‘박풍’의 저력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 데서 오는 불가항력적인 대응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진정성을 가지고 박 전 대표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총선 결과에 따라 외부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협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언제쯤 박근혜 전 대표를 진정성을 가지고 끌어안을 수 있을까. 일단 그 시험대는 친박연대 등의 복당 여부와 7월 전당대회에서 얼마나 권력 균점 의사를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이명박 호’는 이제 막 기름을 채우고 출발했다. 아직 쌩쌩하다. 하지만 비탈길 자갈길을 지나면서 차도 망가지고 기름도 떨어질 때쯤 ‘박근혜 주유소’가 비로소 보일 것이다. 그때 이 대통령이 손을 들고 도움을 청하지 않겠느냐. 지금은 배고픈지 모를 때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