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네디와 재클린 | ||
미미는 열아홉 살 때인 1962년과 63년 사이 백악관 인턴직원으로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자주 성관계를 맺었다고 밝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처럼 애매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노골적인’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클린턴보다는 케네디가 한 수 위였던 것.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키는 케네디가 당시 여대생인 미미의 싱싱한 육체를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안 것은 아니었다.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재키에게 어느날 결정적인 증거물이 발견됐다. 남편과 자신이 자는 침대 안에서 젊은 여성이 입을 만한 것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팬티가 발견됐던 것.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케네디의 얼굴을 향해 문제의 팬티를 내던지며 “이 팬티 누구거예요? 이건 내 사이즈가 아닌데”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재키는 팬티의 주인공을 찾아내는 작업보다는 맞바람 전술을 구사했다. 백악관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키의 ‘복수’가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일을 당한 재키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침을 삼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자동차왕을 먼저 찾아 나서는가 하면,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남으로 평가되던 유명배우 윌리엄 홀든과 섹스를 나누는 등 놀아나기 시작했다.
재키는 자신이 일으키는 맞바람의 실상이 경호요원들에 의해 백악관 주인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그것 때문에 케네디가 화를 내는 것을 지켜보며 오히려 즐거워했다고 한다.
▲ 미미의 62년 인턴 시절, 오른쪽은 최근 모습 | ||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재키는 남편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이번에는 폭로전술이었다. ‘미미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는다면 당신의 부적절한 사생활을 모두 폭로해 정치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재키는 이와 함께 ‘그 어떤 여자라도 백악관을 자기 집 안방 다니듯이 걸어다니는 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다짐도 전달했다. 그것은 미미를 백악관에서 하루빨리 쫓아내라는 경고였다.
케네디는 재키가 그 같은 사실을 공개하고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 재선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미를 해고하지 않았다. 1963년 계약기간이 끝나 대학으로 돌아갈 때 미미는 백악관의 인턴들 중 가장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상까지 받아 챙겨서 갔다.
실제로 미미는 타자도 제대로 못 치는, 인턴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미는 뉴저지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로서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승마를 즐기는, 그런 신분의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백악관 인턴으로 뽑힐 수 있었다.
당시 백악관에서 근무를 했던 한 인사는 “미미라는 여학생에게는 대통령의 넘치는 성욕을 풀어 주는 재능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미가 백악관에서 일한 이유는 직업의식 때문이 아니고 대통령과 섹스를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은 미미가 백악관을 나가던 1963년 11월22일 케네디가 불의의 암살로, 짧지만 화끈했던 생을 마감하면서였다.
문암 해외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