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러리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 | ||
하지만 최근 미 대중지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힐러리가 책 속에서 한 다섯 가지 거짓말”이란 제목 하에 “힐러리는 솔직하지 못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모두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과거 기사를 토대로 비교한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과연 어느 편의 말이 맞는지 한 번 짚어 보기로 하자.’
▲ 클린턴이 힐러리에게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백했을 당시 힐러리는 책에서 “남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분노는 점차 사그라들었으며, 마침내 우리의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녀는 책에서 “전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남편을 피하지 않았다. …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가 1998년 가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주장에 의하면 ‘클린턴을 향한 힐러리의 분노’는 그녀의 고백과는 달리 한동안 진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999년 1월 클린턴은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든 채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이 ‘멍’에 대한 추측은 무성했는데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화가 난 힐러리가 클린턴을 힘껏 내리쳤다는 것이었다. 당시 두 부부가 얼마나 심하게 싸움을 했던지 경호원들이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 “빌과 나는 우리의 결혼생활을 구제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인 결혼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힐러리는 이렇게 책에서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카운슬링까지 받아야 했다면서 착잡한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녀가 언급하지 않은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부부 사이의 진짜 문제, 즉 ‘부부 관계’가 그러했다.
▲ 힐러리는 책에서 ‘르윈스키 스캔들’이 한창일 무렵 클린턴 가족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던 제시 잭슨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쏙 빼놓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영적 리더였던 잭슨 목사는 당시 ‘지퍼 게이트’로 심신이 피로한 클린턴 가족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정신 상담을 해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힐러리는 왜 잭슨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바로 당시 불거졌던 잭슨 목사의 ‘혼외정사’ 스캔들 때문이라는 것이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주장이다. 잭슨 목사가 혼외정사를 벌였던 시점은 공교롭게도 클린턴 가족에게 상담을 해주었던 바로 그때였으며, 클린턴은 당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에게는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 힐러리는 자신에 대한 남편의 ‘또다른 배신’이라고 비난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잭슨 목사는 지난 2001년 전 수석보좌관이었던 카린 스탠퍼드와의 사이에 혼외정사로 둔 딸을 두고 있다는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보도 내용을 시인한 바 있다.
▲ 힐러리는 책에서 1994년 10월 선거 전략가인 딕 모리스와의 통화 내용을 소개하면서 모리스가 “솔직히 클린턴 진영에서 날 대하는 방식이 못마땅하다”란 말을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모리스가 클린턴측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는 것이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주장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클린턴 자신 때문이라는 것.
▲ 클린턴 부부와 딸 첼시의 단란한 한때. | ||
▲ “남편이 골프를 치기 위해 플로리다에 있는 그레그 노먼의 집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두 달 동안 신세를 지고 있던 목발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 남편은 처음 노먼의 집을 방문했을 때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오른쪽 대퇴부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클린턴의 이 일화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 사실. 골프광으로 알려져 있는 클린턴이 ‘백상어’ 노먼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 역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1997년 당시 한 기사에서 “사실 클린턴의 상태는 언론에서 떠드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다. 모두 허풍이다”라고 주장해 관심을 끈 바 있다. 당시 한 목격자에 의하면 끙끙 앓고 있어야 할 클린턴이 노먼과 함께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면서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는 모습에서 ‘환자’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