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식도 하지 않은 노무현 당선자가 ‘4중고’ 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일 대전 충청 국정토론회에서의 노 당선자.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국내적으로는 현대상선 대북 2억달러 송금의 성격과 내용을 놓고 신•구 여권간, 여야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고 지난해 대선 이후 한동안 새 정부 개혁구상에 대해 ‘물밑 불만’을 표시해 왔던 재계와 일부 보수언론 등도 서서히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이라크전 개시가 임박하면서 가뜩이나 ‘시계 제로’ 상태인 경제 여건이 더욱 어려워져 노무현 정부 집권 초기 개혁 드라이브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분석도 대두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북핵 문제가 좀처럼 해결의 가닥을 잡지 못하며 북한-미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확산되는 등 한•미 관계에서 난기류가 형성돼 노 당선자측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또 미국계 신용평가기관들이 향후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자 일부에서는 미국이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본격적인 ‘노무현 길들이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이들 대내외 악재들은 대부분 3~4월에 사태 해결의 분수령을 맞을 것으로 보여 노 당선자로서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어려운 집권 초기를 맞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노 당선자측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국내외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정권 출범 직후부터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다각적인 대책 마련에 고심중이다.
이중 대북 송금을 둘러싼 파문은 노 당선자측에서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집권 초반기 정권 안정 여부를 가늠할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김대중 대통령(DJ)과 노 당선자측이 ‘정치적 해결’이란 공감대를 바탕으로 ‘핵심 관계자 비공개 국회 증언-DJ의 최종 입장 표명’ 카드를 제시했지만 특별검사제를 통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야당과 여론에 부딪혀 묘안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 당선자측은 무엇보다 대북 송금 파문의 성격과 해법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신•구 여권의 입장보다는 야당측 논리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데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MBC가 코리아 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지난 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북 송금 파문의 용도에 대해 ‘정상회담의 대가성’이라고 응답한 의견이 52.2%인데 반해 ‘현대의 대북 사업 독점용’이라고 밝힌 답변은 30.9%로 크게 못미쳤다.
또 ‘현대의 대북 송금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처리가 부적절하다’는 DJ의 발언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가 50.1%로 ‘공감한다’(44.4%)를 앞질렀고 문제 해결을 위해 ‘DJ가 국민에게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항목에는 찬성-반대가 각각 79.1%, 17%로 현격한 격차를 보였다.
이에 앞서 <중앙일보>가 5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대북 송금의 용도와 사법처리 여부에 대해 MBC여론조사와 비슷한 경향이 나타났으며 특히 문제의 해법으로 특검제 도입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72.9%에 달했다. 대선 승리 이후 줄곧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을 여론의 지지로 극복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온 노 당선자측으로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비판여론이 아니라 신•구 여권간,신여권 내부에서조차 해법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 특히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 등 현 정부 대북 정책 핵심 관계자들의 비공개 국회 증언을 통해 사태를 풀어 보려는 DJ-노 당선자측의 구상이 내부에서조차 ‘비현실적’이란 비판을 받으면서 특검제, 검찰수사 등으로 의견이 나뉘고 있다.
▲ 지난 4일 정대철 당선자대미특사(왼쪽)가 미 국방성 회의 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에게 노 당선자를 소 개하는 책자를 선물하고 있다. | ||
반면 구주류의 박상천 최고위원과 중도파의 함승희 의원 등은 “특검은 수사내용이 유출될 우려가 있으며 언론플레이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 곤란하다”고 반박하고 있고 친노측 이해찬 의원도 “정부가 먼저 솔직히 밝히되 그래도 안되면 특검보다는 검찰수사가 낫다”며 다른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불안한 경제여건도 노 당선자측의 고민거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이 소비 위축에 유가 상승으로 교역조건까지 나빠져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낮아지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UBS 워버그와 리먼 브라더스 등 해외 투자기관들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4%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향후 경제상황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낳고 있다.
노 당선자측은 특히 미국-이라크 전쟁이 발발해 국제유가가 1배럴당 30달러 선을 돌파할 경우 경제운용에 상당한 난관이 초래될 것이란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한 측근은 “대략 1배럴당 18달러 전후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중립적이라고 볼 때 35달러대를 넘나드는 최근 유가는 경제운용에 최대 난제다.
지난 98년 2월 DJ정권 출범 1개월여를 전후해 국제 유가가 8~14달러 선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노 당선자는 엄청난 핸디캡을 안은 채 출발하는 셈이다. 특히 유가 앙등이 소비위축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증시 불안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아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이 측근은 또 “경제여건 악화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사회 전반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확산시켜 국민들의 개혁지향성을 무디게 한다는 점에서 새 정부 개혁의 정서적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개혁에 저항하는 재계와 일부 보수언론들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엔 개혁보다는 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적극 유포시킬 것이 뻔해 집권 초기 개혁 드라이브에 상당한 난관을 조성할 것”이라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노 당선자도 최근 “어두운 경기를 거론하면서 위기를 확산시키는 언론보도들이 있다”며 “어두운 보도는 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경계감을 표시한 바 있다. 대외 여건, 특히 대미 관계 악화도 노 당선자측의 부담이다.
최근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 정부 간 이견과 ‘촛불시위’를 계기로 미국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확산되는 등 노 당선자측에 대한 견제가 노골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지난 5일 민주당 정대철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특사단에 “한국 국민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히고 딕 체니 부통령은 “이제 양국 관계가 정부 대 정부를 넘어서서 국민 감정의 수준”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미간 갈등은 이미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형편.
노 당선자측은 미 국방성의 “현재로선 주한미군 철수를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해명을 근거로 ‘대미 관계 이상무’를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새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는 데 대해 긴장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미 갈등은 미국-이라크전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되는 3월 말 이후 북핵 문제로 미국의 관심사가 좁혀질 경우 또다른 고비를 맞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특히 미국 정부 내 ‘매파’들이 이라크전 이후 북한에 대해 무력사용 등 초강경 대응을 택할 것이라는 이른바 ‘한반도 8월 위기설’이 정치권에서 확산되면서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노무현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대북 강경노선에 동조하도록 압박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미국계 신용평가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노무현 길들이기’와 관련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미국 무디스사가 최근 한국 정부에 ‘새 정부 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을 내세워 현재 ‘긍정적’(Positive)인 등급을 한 단계 낮은 ‘안정적’(Stable) 또는 그 이하인 ‘부정적’(Negative)으로 낮추려 한 것은 미국 지도층들이 노 당선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지난 1월 초 방한했던 무디스사 실사단이 일단 한국의 신용등급을 ‘긍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새 정부가 발족하고 경제정책 방향이 확실해지는 오는 3월에 다시 방한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향후 북핵 사태와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싸고 한•미 양국의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를 보고 대외신인도와 직결되는 신용등급 조정 문제를 고려하겠다는 얘기로 가뜩이나 안팎으로 코너에 몰린 노 당선자측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박영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