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고기 정국’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다. 합성한 종이비행기 속 인물은 위부터 홍준표 원내대표, 박희태 전 의원, 맹형규 정무수석.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명박 대통령이 쇠고기 정국으로 엄청난 곤욕을 치르면서 권력 운용 구도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은 핵심 현안마다 일일이 언급하며 직접 해결사 노릇을 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이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오면서 취임 100일 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자신의 수족이었던 청와대 수석비서진을 전부 잘라낼 정도로 권력 운용에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당분간 이 대통령은 자숙 모드를 보이며 잠행하고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임태희 정책위의장의 투톱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될 전망이다.
현재 정치권에선 “‘만사형통’(정치 만사가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통한다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은 이제 물 건너간 구문이 됐고 이제 ‘만책홍통’이 뜨고 있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 당권에 도전한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이 최근 홍준표 원내대표를 향해 “(여권의) 모든 대책(만책)은 홍준표 원내대표를 통한다(홍통). ‘만책홍통’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고 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
이렇듯 홍 대표는 현재 여권 최고의 실세로 통한다. 그는 원래 보스 기질이 강해 기자들 사이에서도 ‘홍 반장’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청와대 ‘오더’를 받은 그의 말 한마디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조건 고시에 대한 관보 게재가 하루 만에 ‘유보’에서 ‘전격 강행’으로 결정된 것은 홍 대표의 위상을 웅변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대운하 폐지와 4대 공공부문 민영화 연기, 고유가 대책 등을 주도하며 반발 여론에 직면한 성장위주의 정부 경제정책 방향타를 수정해 홍 원내대표에 이어 또 다른 실세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임 의원은 이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모두에게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여권의 실세로 통하기 때문에 권력 이너서클의 ‘다크호스’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현재 구상하는 궁극적인 여권 권력 운용의 핵심은 ‘뜨고 있는’ 홍준표 의원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청와대 신 정무라인과의 투톱 협조 체제인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소식에 밝은 여권의 한 소식통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쇠고기 파동을 거치면서 국민과의 소통을 국정 목표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당분간 맹형규 정무수석이 총괄하는 청와대 정무 라인이 여당의 홍준표 대표와 함께 국정 운영의 두 축을 담당할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당·청간 협조 체제의 성공 여부가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정무 라인 완성의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1차 갈등 조짐이 감지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맹활약했던 한나라당의 한 전략가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당·청간 정무 협조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선 맹형규 수석과 홍준표 원내대표 간의 긴밀한 소통이 필수조건이다. 국정 현안을 청와대 정무 라인에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기획한 뒤 그것을 당에 전달하고 협조를 받아내는 게 기본적 협조 사항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맹 수석을 두고 ‘맹하다’라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홍 대표가 맹 수석을 ‘무시한다’는 얘기가 당내에 파다하다. 맹 수석도 지난 2006년 서울시장 후보 당내 경선을 거치면서 홍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보도자료를 내는 등 감정이 좋지 않다. 그런 두 사람이 여권의 정무 기능 협조 체제를 어떻게 이어갈지 정말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지난 2006년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쌓인 감정의 앙금 때문에 협조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이 강하다. 지난 2006년 경선 당시 맹형규 후보가 홍준표 후보를 비방하는 자료를 만들어 지지자 교육에 활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측의 전쟁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은 바 있다.
홍준표 후보는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 2006년 3월 12일 오전 한나라당 기자실에서 회견을 열고 ‘왜 홍준표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가 돼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5대 불가론’이 담긴 문건을 전격 공개했다. 여기에는 홍 후보에게 뼈아픈 내용도 많았다.
홍 후보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문건의 주된 내용은 나의 재산과 관련된 사실관계를 조작, 날조한 것이다. 문건의 주된 내용도 문제지만 그 문건을 교육자료로 삼아 수십 명의 ‘구전 홍보단’이 양성됐다는 사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다”라며 맹 후보를 맹비난했었다. 당시 사건은 문건을 작성했던 맹 후보 측의 관계자를 캠프에서 내보내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양측 관계자들은 그 뒤로도 이 사건을 두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며 감정의 앙금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양측은 그런 지적에 대해 “지난 경선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모두 잊어버렸다”라며 애써 갈등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한나라당 내의 서울 출신 중진그룹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 청와대 정무수석과 여당 원내대표로 다시 만난 뒤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불을 뿜을 것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여권 내부에서 “이명박 1기 청와대 비서진의 실패 원인 중 핵심 사안이었던 ‘부서 간 소통 부재’가 맹-홍 사이에서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박희태 역할론’이 떠오른다. 현재로선 박희태 전 의원이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표최고위원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박 전 의원은 이 대통령으로부터 ‘당·청간 소통’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의원이 당내 원로로서 맹 수석과 홍 대표 사이에 일어날 갈등을 조정할 인물로 적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권에선 현재 홍 대표가 최대 실세로 부상하고 있지만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으로 등극하면 권력 구도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박 전 의원이 맹-홍의 갈등 중재자로 떠오르며 오히려 더 큰 실세로 부상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현재 차기 대표로 유력시되는 박희태 전 의원의 정치적 ‘내공’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가 유력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야생마’ 홍 대표의 코뚜레를 확실하게 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더욱이 박 전 의원은 이상득 의원 등 여권 원로그룹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비주류 출신으로 아직 권력 생리 읽기에 능하지 못한 홍 대표를 확실하게 틀어쥘 것이란 예상이다. 홍 대표가 은근히 원외인 박 전 의원을 무시하며 일방적인 행보를 보일 경우 박 전 의원의 ‘원 펀치’에 홍 대표가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일단 박희태 대표 체제가 출범하면 당분간 그와 홍 대표는 사안마다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잠재적인 경쟁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럴 경우 여권의 권력 구도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내 직할 체제가 확립되면서 그 아래 박희태-맹형규-홍준표의 정립 체제 밑그림이 그려진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진을 진두지휘하다가 정부 부처와의 소통에도 실패했고 결국 국민의 저항을 불렀던 만큼 이번 청와대 비서진 2기 개편 의미는 박-맹-홍의 3각 편대를 내세워 위기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정정길 신임 대통령실장은 청와대 정무·정책 기능을 총괄하고 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정도의 기능에 머물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이 대통령이 정무 기능을 맹 수석에 일임한 만큼 정 실장이 당장 정무 라인업에 대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하지만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도 처음에는 중간 조정자 역할에 그치다가 그에게 힘이 쏠리자 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서를 그가 먼저 보겠다고 ‘덤비면서’ 권력 갈등의 단초가 생긴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정 실장은 여권의 ‘박-맹-홍’ 3각 편대의 날개를 부러뜨릴 수도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에 대해 “정 실장이 단시간 내에 청와대 네트워크를 장악한다면 ‘박-맹-홍’ 3각 편대가 ‘박희태-정정길-홍준표’ 라인업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능력론’에 시달리고 있는 맹 수석의 위상이 ‘얼굴마담’ 정도에 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쇠고기 정국을 탈출하기 위해 그동안의 조심 모드에서 강경 노선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권을 떠받치게 될 ‘박희태-맹형규-홍준표’ 3각 편대의 고공비행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그 뒤를 조용히 쫓고 있는 ‘복병’ 정정길 대통령실장의 행보도 여권의 권력 투쟁 관전 포인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