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기록물 유출 논란을 둘러싼 신구권력간 첨예한 대립이 정가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합성. | ||
사정기관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 등 참여정부 실세들이 ‘사정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공기업 수사 등 강도 높은 사정작업을 펼쳐왔던 사정당국도 ‘공기업 비리 중간수사’를 발표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고 있다. 기록물 유출 건으로 촉발된 신구 정권 간의 ‘문서 전쟁’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진검승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여권과 청와대에서는 모든 것이 법과 원칙에 따른 조치라고 밝히고 있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이 대통령과 청와대가 ‘노무현 죽이기’ 비밀 프로젝트를 물밑 가동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의 노무현 정부 관계자 고발과 강 전 장관 구속 등 구 정권을 겨냥한 일련의 사정 드라이브도 이러한 비밀 플랜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을 강타할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노무현 죽이기’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사정기관 주변에선 ‘노무현 죽이기’ 비 플랜 가동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청와대 민정팀을 정점으로 감사원, 국정원, 검경, 국세청 등 사정기관이 총동원돼 공기업 비리 등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는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지난 3월부터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 대한 강도 높은 감사를 실시해 왔고 검찰과 경찰도 경쟁적으로 구 정권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다. 청와대 민정팀과 국정원도 공직기강 확립과 공공기관 개혁을 명분으로 공기업 비리 및 구 정권 인사들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각종 비리사건을 취합하는 등 레이더를 물밑 가동시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정라인의 중추인 대검 중수부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기업 및 국가보조금 비리를 ‘2대 중점 척결 대상 범죄’로 규정하고 20여 개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대한 감사원 자료와 비리 의혹 제보 등을 취합해 관할 검찰청에 수사 또는 내사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석탄공사와 한국관광공사, 석유공사 등 주요 공기업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참여정부 몇몇 실세들의 연루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관광공사의 자회사 그랜드코리아레저가 운영하는 카지노 보안시스템 사업권 로비 의혹과 관련해서는 참여정부 몇몇 인사들이 일부 언론에 이니셜로 거론되기도 했고 석탄공사 특혜 대출 의혹 사건에도 구 여권 핵심 인사인 L 의원이 개입된 의혹이 제기됐다.
석유공사 수사 과정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황두열 전 사장을 출국금지하는 등 ‘대어’를 낚는가 싶었지만 아직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친노 그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의 실명이 기재된 ‘로비 리스트’가 존재한다고 해서 한동안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했던 S 해운 로비 사건은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의 부인이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일부 인사는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제피로스 골프장 탈세 의혹 사건은 노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창인 정화삼 씨가 이 골프장 대표이사였다는 점에서 대주주인 정홍희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 중 일부가 참여정부 관계자들에게 유입됐을 것이란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사정기관이 눈독을 들였던 이러한 구 정권 비리 사건들이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한때 ‘노무현 죽이기’ 플랜 또한 실체 없는 소문에 불과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강무현 전 장관이 전격 구속되고 국가기록원이 참여정부 관계자 10명을 고발하면서 ‘노무현 죽이기’ 비 플랜에 대한 얘기가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강 전 장관이 참여정부 시절 고위직을 지낸 인사라는 점에서 그의 구속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검찰은 ‘개인 비리’ 차원이라며 정치적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참여정부 게이트’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정치권은 노 전 대통령이 DJ정권 시절 해수부 장관을 지낸 바 있고 집권 후 해수부 출신들을 청와대 참모진에 대거 발탁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강 전 장관에게 뇌물을 전달한 업체들 대부분이 부산·경남지역을 연고로 한 해운업체라는 점에 미뤄 이번 사건을 깊게 파고들 경우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인맥들이 줄줄이 걸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 주변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수석을 지낸 A 씨와 비서관 출신인 B 씨 등 노 전 대통령 핵심 참모들과 당시 해수부(현 국토해양부) 고위 간부 몇 명이 해운업체 ‘로비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검찰은 해운업체들이 강 전 장관뿐 아니라 참여정부 실세와 해수부 고위공무원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로비를 벌인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참여정부 일부 실세들의 연루 의혹이 제기됐던 S 해운 감세로비 사건을 포함해 해운업체의 전방위 로비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나아가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강 전 장관 수사를 계기로 각종 공기업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참여정부 실세들에 대한 사정 작업이 본격화될 것이란 관측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국가기록원이 대통령 기록물 무단 유출 사건과 관련해 참여정부 관계자 10명을 검찰에 고발한 것도 ‘노무현 죽이기’ 비밀 플랜설을 부추기고 있다. 기록원은 7월 24일 “무단 유출된 대통령 기록물의 완전 회수를 도모하고 침해된 법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법과 원칙에 따라 고발하기로 했다”며 노 전 대통령 측 인사 10명을 고발키로 한 배경을 설명했다.
고발된 인사는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업무혁신 업무를 맡았던 김충환·민기영 전 비서관, 구윤철 전 국정상황실장, 김정호 전 기록관리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진 6명을 포함해 참여정부 말기 기록물 관리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이다.
과거 정권 교체 과정에서도 전·현 정권 간에 적잖은 마찰과 알력을 빚어 왔지만 법정 투쟁으로 비화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유출 논란을 봉합하고 측근 인사들의 사법처리를 차단하기 위해 기록물을 반환했음에도 기록원이 검찰 고발을 강행한 배경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기록원 측은 3개월 넘게 수차례의 전화, 공문, 사저 방문 등을 통해 유출된 대통령 기록물을 반환하도록 요청하고 설득했으나 서버를 돌려주지 않는 등 성과가 없어 법적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정치적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한 극도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기록원 측이 독단적으로 검찰 고발을 강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청와대 측과의 긴밀한 협의 내지는 교감이 오갔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와 관련, 여권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여권 핵심부가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관계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는 이른바 ‘7인 회의’를 물밑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7인 회의’에는 이 대통령을 포함해 정정길 대통령실장, 맹형규 정무수석, 정동기 민정수석, 박형준 홍보기획관, 이동관 대변인, 정인철 기획관리비서관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7인 회의’는 이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는 만큼 기록물 유출 건을 비롯해 공기업 비리와 참여정부 사정작업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컨트롤 타워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청와대 측이 ‘검찰 고발’이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든 배경에는 전면전에서 이길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과 함께 정국 대반전 차원의 또 다른 승부수가 내포돼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청와대 측은 이미 노 전 대통령이 기록물 반출 및 폐기를 지시하는 회의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고 사정기관을 총동원한 전방위 수사를 통해 구 정권 비리 사건에 참여정부 실세들이 연루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 전 장관 구속과 기록원의 고발을 신호탄으로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겨냥한 대대적인 사정몰이가 시작될 것이란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와 사정당국의 십자포화가 가시화되자 노 전 대통령과 친노 그룹은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배수진으로 맞서고 있다. 특히 노 전 대통령 측은 “청와대와 국가기록원의 목적이 기록물 회수가 아니라 ‘참여정부 흠집내기’였음이 분명해졌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은 7월 25일 CBS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현 청와대가 수준 낮은 3류 정치공작을 주도하고 있다. 반납까지 한 상태에서 실무자들을 고발하겠다고 한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 여부와 관련해서는 “전직 대통령 문제인데 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말리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말해 이 대통령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친노 직계인 백원우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YTN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검찰 고발 결행은 이명박 정권이 처해 있는 위기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또 다른 ‘정치적 노림수’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친노 그룹의 또 다른 의원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참여정부를 겨냥한 다양한 ‘사정 시나리오’가 나돌았던 게 사실”이라며 “이번 검찰 고발과 강 전 장관 구속 배경에도 ‘노무현 죽이기’ 비밀 프로젝트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출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신구 권력 간 첨예한 대립이 결국 법정 투쟁으로 비화된 만큼 양측의 갈등구조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경우 가뜩이나 ‘쇠고기 파동’과 독도 문제 등으로 양분된 보·혁 이념 대결 구도에 기름을 끼얹는 핵뇌관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신구 권력 간의 첨예한 대치 국면이 정가 주변에서 나돌고 있는 ‘노무현 죽이기’ 비밀 프로젝트설과 맞물려 여의도 정치권을 강타하는 초대형 태풍으로 돌변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소멸될지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