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 ||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재야에 머물던 4년7개월 동안 요코하마의 한 부동산회사의 사원으로 후생연금(샐러리맨이 드는 연금으로 월급에서 보험료 원천징수)에 위장가입했던 일이 드러났다. 고이즈미 총리는 “맘 좋은 사장님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이 자네의 일이니, 회사에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며 자신이 ‘유령사원’이었음을 시인했다.
그 회사에서 실제로 근무한 일이 없는데도 후생연금에 가입한 것은 후생연금보험법 위반이며, 추후 연금을 받게 된다면 사기죄가 추가된다.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생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범죄인 것.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그 부동산회사를 조사할 경우 법무장관을 경질하겠다며 오히려 공공연히 협박하고 있다. 또한 국회에서 위장가입이나 미납사실을 추궁하자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기 마련”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드러난 후 일본 전국의 사회보험사무소 연금상담창구에 문의 전화가 연일 폭주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총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거나 “어떻게 하면 고이즈미 총리처럼 연금을 안 낼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신이 미납한 적은 없는지, 어떻게 해야 미납기간의 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는지를 묻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두둑한 의원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국회의원과 달리 일반 국민에게는 오로지 국민연금만이 든든한 노후 대책이기 때문이다. 총리의 미납사실에 분노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 하는 것. 이로 인해 오히려 미납자가 줄며 연금 재정기반이 탄탄해지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고위층의 연금 불감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주간포스트>는 최근호에서 연금을 관리하는 관료들이 국민연금을 유용했다고 폭로했다.
유명한 골프장이 모여 있는 도쿄 인근 치바현 북부. 그 한쪽에 리조트 호텔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정문에는 ‘사회보험대학교’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그러나 학생은 한 명도 없다. ‘대학교’라고 써있지만 사실은 사회보험청 직원들의 숙박연수시설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후미진 한쪽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골프 연습장이 있다. 정문의 안내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골프장은 국민연금으로 운영되어 후생성과 사회보험청 직원이 사용하는 곳으로 모두 무료다. 물론 민간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골프장 관리자에 따르면 이 골프장은 ‘직원들의 건강유지를 위한 곳’. “연수를 받는 직원들은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빽빽하게 수업을 받는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도 운동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연수시설에 골프장이 필요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국세청의 세무대학교(연수원)에는 풀장도 있지만, 이곳에는 (그런 호화시설은) 없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골프장은 지난 94년 1백6억엔(약 1천6백억원)을 들여 세웠다고 한다. 건설비는 모두 세금으로 충당했지만, 일년에 3억5천엔(약 35억원)이 넘게 드는 운영비의 대부분은 후생연금과 국민연금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시설을 이용하는 사회보험청 직원들은 국가공무원공제에 가입해 있기 때문에 후생연금이나 국민연금을 한푼도 내지 않는다.
고이즈미 내각은 지난 5일 회사원의 연금수급액을 20% 내리고 부담액은 30% 올리는 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정작 연금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연금 미납 및 유용과 관련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