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준표 원내대표가 상임위원장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울 홀대 논란 등 구설에 오르고 있다. | ||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국회 상임위원장 경선이 끝난 후 이명박(MB)계 한 중진이 내뱉은 말이다. 홍준표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내정한 상임위원장 후보 3명 중 고흥길 의원(문화체육관광통신위)만이 정병국 의원에 96 대 37로 낙승했을 뿐, 최병국 의원(정보위)은 권영세 의원과 78 대 78 동점을, 남경필 의원(통일외교통상위)은 박진 의원에 75 대 81로 패배한 것을 두고 한 얘기다.
집권여당에서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선이 벌어지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지도부가 내정한 후보가 탈락하는 상황도 보기 드문 일.18대 국회 원 구성 협상과정에서 가뜩이나 데미지를 입은 홍 원내대표로선 이번 일로 당내 입지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리게 됐다는 평가다.
당내에선 지도부 입장에서 ‘1승1무1패’인 경선 스코어를 ‘반(反) 홍준표’ 기류에 비주류인 박근혜계의 저력이 더해져 나타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 원내대표의 독선적 국회 운영에 불만을 가졌던 의원들과 상대적으로 MB계 색채가 옅은 후보를 박근혜계가 지원한 결과라는 얘기다.
실제 홍 원내대표는 한나라당 몫 11명의 상임위원장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통상 선수(選數)와 지역, 전문성을 기준으로 위원장 후보를 안배했던 관행에 비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서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홀대’ 논란. 홍 원내대표가 내정한 상임위원장 후보 중에 자신이 당연직으로 맡게 되는 운영위원장 외엔 서울 의원이 1명도 없다는 점이 불씨가 됐다. 특히 40명의 의원이 있는 서울에서 상임위원장 후보로 1명이 할당된 반면,34명의 의원이 있는 경기도에선 위원장 후보가 4명(남경필 김영선 심재철 고흥길)이나 돼 “지역 안배의 원칙을 거스른 것”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박진(종로)·권영세 의원(영등포 을)이 경선에 나선 데는 1차적으로 서울지역 의원들의 이러한 정서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물론 두 사람이 당내에서 손꼽히는 외교통(박 의원),정보통(권 의원)으로 전문성 면에서 상대인 남·최 의원을 앞선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것은 홍 원내대표에 박·권 의원이 ‘반기’를 들고 나선 배경에 차기 서울시장을 둘러싼 갈등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점이다. 2006년 서울시장 당내 경선에 출마했던 홍 원내대표와 박 의원은 오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재수’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한 상태이고, 권 의원 역시 도전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겉으론 이러한 분석을 부인하지만 물밑에선 서로 상대방의 ‘저의’를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홍 원내대표 측은 “박·권 의원이 다음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이번에 무조건 상임위원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사단이 난 것 아니냐”고 주장했던 반면 박·권 의원 측은 “홍 원내대표가 차기 서울시장의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두 사람을 상임위원장에서 배제한 것”이라고 맞섰던 것이다.
▲ 박진 의원은 통일외교통상위원장 당내 경선에서 남경필 의원에 승리했다. | ||
박근혜계의 ‘표 쏠림’도 주요 관전 포인트였다.70여 명의 의원을 보유한 박근혜계가 이번 경선에서도 특유의 응집력을 발휘하며 판도를 갈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박근혜계 핵심 중진은 “계파 차원에서 누구를 밀자는 논의는 없었지만 박·권 의원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던 것은 사실”이라며 “결과를 놓고 보면 두 사람에게 표가 쏠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박근혜계 의원들이 경선에서 MB계인 남경필·최병국 의원이 아닌 중도성향인 박·권 의원을 지지했다는 얘기다. 남 의원의 경우 박근혜 전 대표가 당 대표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소장파 핵심으로 줄곧 반대편에 섰던 데다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막판에 MB 지지를 선언한 ‘전력’이, 최 의원은 MB계 중에서도 이재오계가 중추를 이루는 의원모임 ‘함께 내일로’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것이 ‘비토’ 사유가 됐다는 분석이다.
반면 박진·권영세 의원은 지난해 대선후보 경선에서 중립을 지켰던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됐다. 특히 권 의원은 사무총장 시절 당 밖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 의원들의 복당을 위해 노력했던 점이 높이 평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의 한 핵심측근은 “박·권 의원은 정치적 성향이나 전문성, 당내 기여도를 볼 때 당연히 상임위원장을 받았어야 할 사람들”이라며 “홍 원내대표가 자기 욕심에 순리에 어긋나는 인선을 해서 탈이 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경선에서 뜻밖의 낭패를 본 남경필·최병국 의원은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연장자 우선’ 규정으로 겨우 당선된 최 의원은 경선을 전후해 홍 원내대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 의원은 경선 직후 몇몇 후배 의원들에게 “검사 임관 시기로 따지면 17년 후배인 권 의원과 동점이 나왔는데 이게 무슨 망신살이냐. 홍 원내대표는 정보위원장 맡으라고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느냐”며 울분을 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의원은 경선 직후 권 의원에게 “자네가 이기고 내가 졌다.이제껏 나이 많은 것을 약점으로만 여겼는데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허탈해 했다고 한다.
한때 원희룡·정병국 의원과 함께 ‘남·원·정 그룹’으로 불리며 당내 소장파의 리더로 각광을 받던 남 의원도 타격이 적지 않게 됐다. 당내에선 남 의원이 △선수(4선)에 비해 낮은 연령(43세) △18대 총선 직전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등 지나치게 여론을 의식한 튀는 행동 △경기도 의원들이 4명이나 상임위원장 후보로 내정된 데 대한 타 지역 의원들의 반발 등을 고려치 않고 홍 원내대표의 뜻에 따라 나선 것 등을 패인으로 보고 있다.
남 의원이 특히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대목은 자신의 지지그룹으로 여겼던 초선 의원들마저 경선에서 등을 돌렸다는 점. 한 중진은 “이번 경선은 한마디로 당내 소장파들의 그동안의 행보에 대한 정치적 심판”이라며 “남 의원이 정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 같다.이제껏 자신이 해온 정치행보에 대해 전면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