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와 엇갈린 행보를 보이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작은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박 대표를 ‘힘 빠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를 여당 대표로 만든 청와대의 태도다. 당 내외 현안에 박 대표가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면 청와대가 ‘태클’을 걸고 나오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청수 경찰청장의 진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인 예다. 박 대표는 불교계가 ‘종교 편향’을 내세워 현 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는 등 사태가 심각한 국면으로 흐르자 불교계의 ‘공적’(公敵)이 된 어 청장의 경질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 최고위원회의(8월 25일)에서 공개적으로 ‘속내’를 밝혔고 청와대에도 이러한 뜻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반응은 냉담했다. 불교계를 달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기가 보장된 경찰총수를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음에도 교체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대표가 괜한 얘기를 해서 대통령의 입장은 어렵게 만들고, 불교계의 기대치는 높여 놨다. 어 청장 사퇴는 애당초 불가능한 사안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경질 불가’ 기류가 예상외로 강경하자 박 대표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어 청장 파면 요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내가 공개적으로 얘기하긴 어렵다”며 피해갔다.
박 대표와 청와대 간 ‘코드 불일치’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7월 하순에는 박 대표가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대북 특사 파견’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이명박 대통령(MB)이 직접 나서 “북한이 당장 (특사를) 받아들이긴 힘들지 않겠느냐”며 ‘뭉개는’ 일이 발생했다.
앞서 7월 중순 당직 개편에서는 박 대표가 ‘탕평 인사’ 차원에서 사무총장에 박근혜계 인사를 발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역시 청와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결국 사무총장엔 이재오계의 ‘좌장’ 격인 안경률 의원이 임명됐다. 박근혜계는 당장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에 이어 사무총장까지 핵심 당직을 MB계가 독식했다”(허태열 최고위원)고 반발했다.
당내에선 계속되는 박 대표와 청와대 간 ‘엇박자’의 근본 원인을 당을 친정(親政)체제로 운영하려는 MB의 의지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나름대로 독자 영역을 개척하려는 박 대표의 시도를 MB가 용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MB가 최근 한나라당 당직자 전원(8월 20일)과 당 사무처 직원(8월 22일), 대선캠프 특보단(8월 26일)과 잇따라 만찬을 가지며 당과의 ‘직접 소통’에 열의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란 해석이다.
당 안팎에서 ‘영이 서지 않는’ 장면이 자주 발생하는 것도 박 대표의 고민거리다. 일부 광역지방자치단체장들이 내놓고 반기를 드는가 하면 초선의원들조차 거침없이 당 대표를 비판하고 있는 형편이다.
수도권 규제 문제를 놓고 여권 핵심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김문수 경기도 지사가 대표적인 케이스. 박 대표는 8월 20일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일부 자치단체장의 발언이 상궤를 넘는다는 지적이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최근 수도권 규제 완화가 빠진 ‘지역 발전 전략’을 내놓은 것과 관련, MB와 정부를 향해 “배은망덕하다”, “정신 나간 시대착오적 정책으로 공산당도 안 하는 짓” 등의 독설을 퍼부은 김 지사에 대한 ‘공개 경고’였다.
그러나 경고장을 받은 김 지사는 바로 다음날(8월 21일)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저 사람의 말이 민심에 맞는지를 봐야지 자기에게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로 판단하면 안 된다”며 오히려 박 대표를 비판하고 나섰다. 앞서 이완구 충남지사는 8월 5일 민생투어를 위해 지역을 방문한 박 대표의 면전에서 “한나라당이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라며 박순자 최고위원과 설전을 벌여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바 있다.
당내에서도 계파를 불문하고 박 대표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대표와 가까운 박근혜계의 한 중진은 “청와대와 MB계의 눈치를 보느라 박 대표가 당 운영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작금의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MB계도 박 대표에게 불만이긴 마찬가지. 이재오계로 ‘MB 친위대’로 불리는 김용태 의원은 공개적으로 “박 대표 스스로가 의원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어야 한다. 술 한 잔 마신다고 스킨십이 아니지 않느냐”고 직격탄을 날린 후 “원칙을 제시하고 ‘당 운영을 도와달라, 당과 나라를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말이 좋아 소통이지 무슨 소통을 했다는 것이냐”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다.
9월 1일부터 정기국회가 개회되면서 원외인 박 대표의 입지가 더욱 더 좁아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모든 현안이 국회 내에서 다뤄지는 만큼 당 운영도 홍준표 원내대표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당 일각에선 박 대표가 지금처럼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내년 4월께로 예상되는 재·보궐선거에서 ‘위기’를 맞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 대표도 돌아가는 형편이 심상찮다는 점을 느끼고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8월 26일 소속 의원 13명으로 매머드 특보단을 구성한 것이 시작이다. 특보단은 재선의 최구식 의원이 단장을 맡고 김세연 김영우 김용태 나성린 배은희 신지호 안형환 이달곤 이철우 정미경 주광덕 조진래 의원 등 분야별로 전문성을 인정받는 초선 12명이 멤버다. 이들은 정례회의를 통해 주요 현안과 여론동향을 수시로 정리한 후 격주로 박 대표와 만나 정국과 당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내에선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인 박 대표의 향후 위상에 따라 여권 내 전반적인 역학구도가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계파갈등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는 박 대표의 부침에 따라 MB계와 박근혜계가 다시 정면충돌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연 박 대표는 지금의 보이지 않는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무기력의 늪에 빠져 조용히 가라앉고 말까.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