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공안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야권은 “정부의 정치적 작업이 아니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사진은 베이징올림픽 선수단 환영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
현재 민주당은 ‘신 공안정국’ 진단과 관련해 9월 정기국회에서의 ‘거리와 국회’ 병행 투쟁을 선언해놓고 있어 여야 사이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여권이 일련의 ‘공안정국’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9월 정기국회의 기선제압을 위해 의도적으로 아젠다 세팅을 선점하려는 전략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야당 측의 주장대로 이명박 정권의 민심잡기용 신 공안정국이 시작된 것일까. 여야 정쟁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본다.
“좌파진영의 연세대 오세철 명예교수 전격 체포와 이번 여간첩 원정화 사건 등의 일련의 흐름을 보면 여권 핵심부의 치밀한 여론관리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지지율 회복을 노리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선 환율 위기 등의 부정적 이슈를 희석시키기 위해 이념 논쟁을 추석 전에 미리 터뜨린 것 같다.”
정치 컨설팅을 하는 정치학 교수 A 씨는 최근 여간첩 원정화 사건 등 일련의 공안 사건을 접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 권위 정부 시절 시국이 여권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공안 사건이 터지곤 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여의도의 야당 관계자들도 최근 문제가 된 공안 사건들에 대해 “추석을 앞두고 여권 정무라인이 뭔가 ‘작업’을 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부 여당 측에서는 이번 사건이 10년간 조성된 해이된 안보의식의 결과라며 이를 정국 타개용으로 몰아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햇볕정책을 펴면서 우리의 대북 경계심과 안보의식이 풀어질 대로 풀어진 상황에서 나온 결과물 이라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자행됐던 공안 정국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안보를 방치할 수는 없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야당 측은 여권의 의도에 강한 의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여권의 한 정무라인이 추석 민심 관리 대책안을 여러 개 만들어 시뮬레이션을 했다고 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공안 이슈를 적극 활용해 지지층과 비지지층을 확실하게 분리시켜 놓아야 한다’는 전략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에 따르면 지난 촛불정국을 거치면서 ‘쇠고기’라는 생활 이슈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층이 진보 진영 지지층에 뒤섞이거나 흡수되면서 현 정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정국이 수습 국면에 들어가면 그동안 흩어졌던 전통적인 이 대통령 지지층을 촛불민심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분리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공안 사건이 유력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이념은 여전히 ‘피아’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현재 야당이 ‘신 공안 정국 조성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여권 정무 라인의 치밀한 여론관리 전략에서 공안당국의 이러한 움직임이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중앙지법을 나오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운영위원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야권은 의심할만한 구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운영위원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전격 체포 건의 경우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돼 경찰의 영장 청구에 무리가 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오 교수는 “검찰이 갖고 있는 나와 관련된 파일만 1만 페이지가 넘었다. 수사를 받으면서 공안기관들이 1년 전부터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주목하고 기획수사를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정세 등을 고려해 언제 터뜨리느냐만 남아 있던 문제인데 기관들이 시점을 잘못 택한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노련은 올 2월 창립해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서울 용산구에 있는 자신들의 사무실 주소까지 써놓았다. 이런 단체가 얼마나 국가 변란을 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사노련의 과격한 이론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론적 과격함이 실제 현실적 과격함으로 이어질 수 있을 만한 조직력으로까지 뒷받침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여간첩 원정화 사건에 대해서도 그 발표 시기와 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야당과 진보진영 측은 여간첩 사건이 발표된 날이 이명박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불교계가 처음으로 ‘범불교도대회’를 연 날이었다는 점에서 불교도대회의 후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여간첩 사건을 그 날 오후에 맞춰 전격 발표한 것은 아닌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청와대에서는 불교계의 현 정권에 대한 반발에 대해 고민과 함께 냉정한 반응도 많이 나오고 있다. 불교계의 불만이 특정 이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차별이라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해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불교계가 요구하는 어청수 경찰총장 교체 등의 각종 요구를 모두 거부키로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난 8월 27일 열린 범불교도대회는 청와대로서는 큰 우려의 대상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촛불정국으로 세게 덴 적이 있는 여권으로서는 불교도대회에 대해서도 사안의 경중을 떠나 세심한 여론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여간첩 원정화 사건 발표 시점은 절묘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불교도대회가 오후 1시에 시작해 4시를 넘어 진행 중이었고 여의도 하한 정국에서 별다른 이슈가 없었던 언론에선 이 집회를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검찰이 집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오후 3시에 한 언론사의 엠바고(보도 잠정적 유예) 파기로 서둘러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여간첩 사건이 각 언론사의 톱 거리로 바뀌어버렸고 그 뒤 여론도 불교도대회에서 여간첩 사건으로 급격하게 옮겨갔다.
야권에서 여간첩 사건의 발표 시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검찰과 경기경찰청 등이 약 3년 전부터 원정화씨를 내사하다가 지난 7월 15일경에 전격 구속한 뒤 계속 조사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는 “공안 사건의 경우 몇 년씩 내사를 하긴 하지만 이번 여간첩 사건의 경우 확실한 증거가 확보됐다고 판단해 구속했을 것인데 구속하고도 한 달 보름이 지난 뒤에야 수사 발표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빨리 사건 처리를 하는 게 당연한데 발표 시점을 조율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라고 말했다.
▲ 북한 직파간첩 혐의로 구속된 원정화 씨. 연합뉴스 | ||
이런 우려와 의심에 대해 정부 측은 지나친 의심이며 오히려 간첩 사건을 정국 주도권 싸움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야당이라고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여당도 최근 정국과 관련 새로운 돌파구 마련을 위한 승부수가 아쉬운 실정임은 부인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를 위해 청와대도 추석을 앞두고 대대적인 ‘이명박 지지율 끌어올리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는 ‘Again 2006’에 대한 일종의 추억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석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종의 전환기이자 도약기였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지난 2006년에 추석의 ‘구전 효과’로 대권 경쟁자인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율에서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로 따돌린 경험이 있다. 그 전만 해도 박 전 대표와 엎치락뒤치락 하며 경쟁을 벌였지만 추석을 지나면서 대세를 장악한 뒤 경선 때까지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아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청와대도 추석 민생대책의 경우 예년에 추석 2주전에 발표하던 것을 이번엔 일주일 앞당겨 관리에 들어가며 민심잡기 대작전에 이미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에서는 이런 상황과 일련의 간첩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야권의 분석은 다르다. 앞서의 정치학 교수 A 씨는 이에 대해 “추석 때 어떤 이슈가 국민들의 관심사에 오를 것인지, 그 아젠다 세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도 바뀌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 이명박 정권의 여간첩 사건 발표 등 일련의 이념 정국 조성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야당인 민주당에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도하는 아젠다가 이슈화되지 못하고 여권에 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권의 추석 민심 관리 특별 대책도 환율 위기 등이 계속될 경우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많다. 결국 경제 위기에 대한 대안 등 정면돌파로 민심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말했다.
과연 ‘신공안정국’ 논란이 정국의 새로운 불씨가 될지 추석 정국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