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국방위원장. 왼쪽 사진은 드라마 <첫사랑>의 김지수와 신성우. | ||
지금까지 북한은 철저한 감시와 사상통제로 굳건한 체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외국으로부터의 정보유입이 그것이다.
우선 휴대폰의 유입이 큰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간사이대학의 이영화 교수는 “중국 국경부근에서 넘어오고 있는 중국제 휴대폰은 국제전화를 걸 수 있도록 불법 개조된 것이다. 북한 당국은 반동분자가 이러한 전화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고 수사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한다. 올해 4월 용천역 열차 폭발사고에 대해 북한 당국은 “휴대폰을 이용한 테러로, 휴대폰을 가진 자가 범인”이라며 휴대폰 규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VCD의 폭발적인 보급이다. 이영화 교수가 최근에 입수한 북한당국의 문서에는 ‘이색적인 녹화물과 출판선전물을 이용, 유포시키는 현상과 강하게 투쟁하자’는 김정일의 지시가 써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색적인 녹화물’은 VCD에 녹화된 한국의 TV 드라마다.
아시아 프레스의 이시마루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VCD는 중국에서 밀수한 것이다. 중국경제는 포화상태로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진 상태라 중고 VCD 플레이어는 3백엔(약 3천원)에서 5백엔(약 5천원) 정도면 살 수 있고, 복제된 한국 드라마 VCD는 15엔(약 1백50원)에서 20엔(약 2백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밀수업자들은 한국 위성방송을 수신해 VCD에 녹화한 후 북한 국경을 넘어와 플레이어와 VCD를 세트로 빌려준다. 북한 내 부유층이 자택에서 상영회를 열고 참가자로부터 돈을 걷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시마루씨는 “처음엔 중국의 쿵푸 영화가 인기였다. 이후 한국말로 된 드라마로 인기가 옮겨갔다. 밀수업자들은 국경 경비병에게 뇌물을 건네고 VCD를 들여오는데, 경비병들도 단속은 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VCD를 돌려본다”고 말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4백여 명의 탈북자들을 취재했다는 이시마루씨는 그들에게 어떤 드라마를 봤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까지도 열광하게 만든 드라마 <첫사랑>은 불륜 이야기다. 긴 머리와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진 남자 주인공인 신성우는 북한에는 없는 타입의 남성. 반면 여자 주인공인 김지수는 투명한 피부의 고전적인 미인으로 북한의 기쁨조와 비슷한 타입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한 이 드라마에 북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시마루씨는 “일단 한국 드라마는 북한의 드라마와는 달리 정치색이 없고, 내용이 자유롭고 재미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적대시해왔던 한국이 사실은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였다는 현실을 드라마를 통해 알게 돼 자신들의 상황과 비교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경제난에 허덕이게 된 것은 잘못된 체제 때문이고, 나아가 김정일에게 속아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점점 늘고 있는 탈북자 중에는 중국 당국의 단속 강화로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다. 외부세계를 접한 그들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본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이런 정보가 확산되면서 김정일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김정남 세대의 당간부 자녀들은 외국에 대한 동경 때문에 망명을 택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 조선노동당 오극렬 작전부장의 아들이 미국으로 망명한 바 있다.
이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휩쓴 한류 열풍. 이번에는 북한의 차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