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한나라당의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상득 의원과 나란히 앉은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제6정조위원장)이 지난 7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밝힌 얘기다. 나 의원의 발언은 금기시돼 온 당내 계파 문제를 공개석상에서 꺼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계파 간 역학관계의 변화를 정면으로 거론해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한나라당 내 계파 지형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MB계와 박근혜계를 양대 산맥으로 하는 기본 틀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일부 의원, 특히 초선그룹을 중심으로 ‘계파 이동’의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판도가 뒤흔들릴 것이라 단언하긴 이르지만 향후 당내 역학관계, 멀리는 차기 대권구도에도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형 변화의 기본 방향은 ‘느슨한’ MB계와 중도성향 의원들이 대거 박근혜계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직 직접적으로 박근혜계 일원이 됐음을 선언한 의원은 없다. 그러나 당내 곳곳에서 이러한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장면들이 목격되고 있다.
전체 172명인 한나라당 의원들의 계파 분포는 MB계가 105명 내외, 박근혜계 60여 명.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몽준 최고위원 등 중도파는 한 자릿수라는 것이 정설이다.MB계가 수로는 박근혜계를 압도하고 있으며 특히 박희태 대표를 정점으로 당 지도부는 MB계가 독점하고 있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MB계가 구심점 없이 원심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반면 박근혜계는 특유의 응집력을 바탕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MB계 내에서 ‘계파 색’을 지우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박근혜계 의원들과 접촉을 늘려나가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변화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지역은 영남권이다. 박 전 대표가 영남권 장악력이 워낙 큰 데다 이 지역에서 지난 18대 총선 때 ‘박풍’(박근혜 바람)의 위력이 집약적으로 나타났던 영향이 크다. 그만큼 영남권 범MB계 내지 중도성향 의원들의 박근혜계로의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부산의 경우 중도로 분류됐던 K·J·P 의원이 사실상 박근혜계로 정리가 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분류하면 부산에선 한나라당 의원 16명(김형오 국회의장 제외) 중에 박근혜계가 14명을 점하게 돼 그야말로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 천하’가 된다. 경남에서도 범MB계로 분류되던 K·Y 의원과 중도 성향의 K·H 의원이 박근혜계와의 접촉면을 넓히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인근 지역의 K 의원도 비슷한 케이스로 거론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박 전 대표의 ‘안방’격이었던 대구·경북도 ‘친박 일색’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확실한 MB계는 지역 전체 의원 27명 중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이병석 주호영 강석호 이한성 의원 등이 고작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중도성향의 L·J·B 의원은 자신을 친박으로 분류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수도권에선 MB계 초선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우선 최근 ‘당내 야당’, ‘초 계파’를 내세워 발족한 ‘민본 21’에 참여한 MB계 8명이 눈길을 끈다. 권영진 권택기 김성태 김영우 신성범 윤석용 정태근 주광덕 의원 등이 그 면면이다. 민본 21에는 이들 외에 박근혜계인 김선동 현기환 의원, 중도성향의 김성식 황영철 의원 등도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엔 MB의 핵심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MB가 서울시장 시절엔 정무부시장으로, 대선 후보 시절엔 수행단장으로 ‘모셨던’ 정태근 의원이 대표적이다. 권택기 의원도 정 의원과 마찬가지로 MB의 가신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안국포럼 출신으로 MB가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서실 정무기획2팀장을 지낸 경력을 갖고 있다.
또 당 장애인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석용 의원 역시 당내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MB의 ‘장애인 표’를 관리해온 측근이고, 김영우 의원은 MB의 ‘1호 공약’인 한반도대운하를 공약화하는 데 참여한 인물이다. 권영진 의원도 2002년 MB가 서울시장에 출마할 무렵 교육특보 겸 스피치라이터로 일한 경력에, 후원회장이 MB의 형인 이상득 의원일 정도로 MB의 측근이다.
이들 의원들은 민본21 참여를 박 전 대표 측과 ‘교감’하는 계기로 보는 일부 분석에 대해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MB계 내 주류로서 박근혜계에 대해 배타적인 이재오계와의 차별성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의원은 “박 전 대표는 당의 훌륭한 자산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치지도자다.MB정권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박 전 대표가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MB계가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중 권영진 윤석용 의원은 지난달 초 김성식 김선동 의원 등과 함께 박 전 대표와 오찬을 함께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주목을 끈 바 있다. 당시 오찬에선 참석자들 중에서 “초선 의원들이 박 전 대표를 보고 싶어 한다”는 등 사실상의 ‘러브콜’도 나왔다고 한다.
비례대표 중에서도 ‘계파 정체성’이 흔들리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당내 중론이다.18대 총선 직후엔 22명의 비례대표 의원 당선자 중 박근혜계를 표방한 이는 박 전 대표의 ‘입’인 이정현 의원이 유일했다. 그러나 최근엔 K·L·K·J 의원 등 5~6명이 ‘유사 박근혜계’로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 이처럼 계파구도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MB계 내부의 난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4·9총선 전 이상득 의원의 출마를 둘러싼 갈등에다, MB계 핵심 중 핵심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방호 전 사무총장·정종복 전 제1사무부총장·박형준 전 의원 등의 낙선, 총선 후 이상득 의원과 정두언 의원 간 ‘권력 사유화’ 전쟁 등 거듭되는 내부 악재들이 겹치면서 사분오열된 탓이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 7·3 전당대회 이후에도 박희태 대표·홍준표 원내대표·임태희 정책위 의장·공성진 최고위원 등 MB계를 대표해 지도부에 진출해 있는 핵심들 간에 불협화음이 자주 발생하면서 계파 결속력이 크게 떨어진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박 대표와 홍 원내대표는 최근 어청수 경찰청장 경질과 ‘연말 여권 대개편’을 놓고 서로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냉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때 10%대까지 떨어졌던 MB의 국정지지도가 좀처럼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MB계 의원들에서 총선 전까지는 ‘MB 브랜드’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앞으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벌써부터 2012년 19대 총선에서 MB가 공천과정에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면서 MB계 의원들의 마음은 바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도 더해진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