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도 “대권 레이스의 흥행도 높이고 무엇보다 흐트러진 친이그룹의 결속력도 강화하기 위해 대표성 있는 차기 주자들을 조기에 띄워야 하지 않느냐”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하지만 차기 주자 급부상은 필연적으로 이 대통령의 통치 기반 일부를 깎아내린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과 같다.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차기 주자 관리, 그 내막을 따라가 봤다.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여권의 차기 주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육사 11기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우산’ 아래에서 내무부 장관, 민정당 총재 등을 거치며 착실히 대권 수업을 쌓아나갔고, 결국 대통령직에까지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부터 체계적인 권력 승계 수업을 받은 차기 주자는 그가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의 대통령들은 전 전 대통령처럼 차기 주자를 키워주며 ‘관리’했다기보다 여권 주자들이 치열하게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는 감히 누구도 ‘차기’를 입 밖에 내지 못했기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 같은 ‘황태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여권은 3당 합당으로 민정-민주-공화계 등으로 나눠지면서 차기 주자들끼리 피 튀기는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현직 대통령들은 차기 주자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며 ‘관리’하기가 불가능했고 따라서 그들의 권력투쟁을 방임하며 후반기에는 레임덕에 빠지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차기 주자 관리 스타일을 보면 현직인 이명박 대통령의 대권주자 관리법도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박태준 전 총리 등 민정계를 차기 주자로 점찍었지만 결국 민주계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현재의 친이그룹처럼 여권의 주류로 군림했던 민정계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문건 공개 등의 초강수에 밀려 현재의 비주류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그룹과 같은 위치에 있던 민주계에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보호막이 돼 줄 것으로 믿었던 박태준 전 총리의 낙마로 김영삼 정권 때 12·12 사태 등과 관련해 감옥에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은 차기주자로 떠오르는 이회창 총재(오른쪽) 대신 이인제 의원을 선택, 여권 분열을 초래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권주자를 고를 수 없었다. 그는 권노갑 전 고문 등의 동교동 직계가 지지하는 이인제 후보와 비주류였던 노무현 후보 사이에서 끝까지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당시 노 후보는 광주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여당의 차기 주자가 됐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오더’를 받은 동교동계의 연청 등이 노 후보를 뒤에서 지원해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얘기가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이 이인제 후보와 노 후보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하다가 막판에 ‘신선한’ 노 후보를 선택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하지만 노 후보는 그 뒤에도 “동교동계가 여당 후보인 나를 얼마나 흔들었나. 나는 내 힘으로 대권을 잡았다. 그들에게 부채 의식은 없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여권 주자 관리 방식은 끝까지 오락가락 행보였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민의 정부 최대 치적이던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을 실시할 빌미를 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기 주자 관리 방식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방임형에 속했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이 여당 내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긴 했지만 ‘당·청 분리’라는 스스로 만든 줄에 묶여 여권의 대권주자 선택에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내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차기 대권주자로 점찍고 물밑 지원을 했지만 여당 장악에 실패하면서 ‘일장춘몽’에 그치고 말았다. 대신 그에게 끝까지 대립각을 세우면서 차기 주자로 성장했던 정동영 전 의장이 대권 후보로 올라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정치권에선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 가장 영향력이 없는 현직 대통령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어떨까. 현재의 여권 권력 구도로 볼 때 이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차기 주자 선정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없는 대통령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정계의 관측이다. 먼저 이 대통령은 떠오르는 현재의 차기 주자와 가장 관계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좋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역대 여권의 차기 주자들은 대부분 현직 대통령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필연적인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충돌하며 사이도 틀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런 권력 이양 과정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경우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1차 전쟁’을 치렀던 최대의 정적이자 현재의 권력도 위협하는 여권 내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친이그룹 내부에서는 ‘두 사람의 화해는 불가능하다’라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특히 박 전 대표의 ‘대세론’이 갈수록 공고화되고, 친이그룹의 차기 주자 옹립이 더욱 난망한 상황이 계속되면 이 대통령이 차기 주자를 관리하고 싶어도 관리할 수 없는 옹색한 상황이 더 빨리 올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친이그룹에서 대표 주자를 내세우지 못하게 되면서 박 전 대표가 여권의 차기 주자로 우뚝 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도가 도래할 것이라는 얘기다. 내세운다 하더라도 박 전 대표라는 거물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군소후보가 된다면 상황은 마찬가지다.
▲ 친박계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박근혜 전 대표. 박 전 대표는 유력한 차기주자로 벌써부터 손꼽히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이 차기 권력 구도에서 수세적인 국면에 처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 친이 의원도 “지금이야 권력 초반이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영’이 선다. 하지만 다음에도 배지를 달아야 하는 현직 의원들로서는 차기 권력에 상당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이 대통령은 친이그룹에게 권력 재창출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권력 후반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이 대통령이 ‘인증’한 친이그룹 후보가 뜨지 못할 경우, 급속하게 박 전 대표 쪽으로서의 힘 쏠림도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대통령이 차기 주자 선정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이 차기 주자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그 ‘관리’에 실패할 경우,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이회창 모델’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대권 후보가 된 뒤부터 철저하게 김 전 대통령을 ‘깨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쌓아나갔다. 그는 당시 여당에 미래 집권자라는 확실한 비전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 세력을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 총재의 존재가 반가울 리 없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김 전 대통령은 ‘배은망덕’한 차기 대권주자와 대선에서 마지막 권력투쟁을 벌였다. 결국 그는 이인제 후보의 출마 용인으로 3자 대결의 여권 분열을 초래, 김대중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심심치않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박근혜 전 대표는 과거 이회창 총재처럼 여권 내에서 확실한 차기 주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가장 강력한 차기 권력 창출자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부동층의 여권 의원들을 블랙홀처럼 흡수해 나갈 것이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화해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박 전 대표가 여당 후보로든지, 제3당 후보로든지 간에 대선에 나선다면 그도 친이그룹의 대표자를 내세워 과거 16대 대선처럼 3자 구도를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있다. 먼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여권 분열이라는 자충수를 두면서까지 화해하지 않고 갈등의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다. 또한 친이그룹에서 박 전 대표와 대적할 만한 가장 확실한 후보를 찾는 데 실패할 경우다. 현재의 여권 권력 구도를 볼 때 이 두 가지 선결 조건의 성립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여기에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끝까지 대한민국의 리더로 인정하지 않고, 차라리 권력을 야권에 넘겨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의 차기 주자 관리는 ‘김영삼-이회창 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차기 주자 관리는 칼의 양날과 같다. 그로서는 여권의 차기 주자 부상이 자신의 조기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려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친이그룹 차기 주자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면 박근혜 전 대표에게로의 힘 쏠림과 함께 당 장악력 약화, 나아가 국정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딜레마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이 2인자를 내세워 위기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묘한 정치적 ‘뫼비우스의 띠’를 그는 과연 풀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