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맨’으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안드레아스 그라슬과 그가 말없이 그렸던 문제의 피아노 스케치. | ||
그의 이름은 안드레아스 그라슬(20). 독일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 프로스도르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실어증에 걸리지도, 기억상실증에 걸리지도 않았으며, 또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도도 아니었다. 연주 실력도 ‘엘리제를 위하여’ ‘월광 소나타’ 등 특정한 몇 곡만을 칠 수 있는 실력에 불과했으며, 건반 하나만 단조롭게 두드릴 수 있는 평범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선 그간 사람 찾는 광고를 내는 등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밝힐 수 없었던 그의 정체는 어떻게 밝혀진 걸까.
그라슬의 정체가 하루아침에 드러난 것은 그가 스스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4개월이 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애타게 했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간호사에게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나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온 안드레아스 그라슬입니다.”
영국 주재 독일 대사관의 도움으로 신분이 확인되자 그는 즉시 고향으로 돌려 보내졌으며, 현재 부모 집에서 은둔한 채 오로지 변호사만을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또 하나 드는 의문점은 왜 그의 부모와 고향 사람들, 혹은 학교 동창들이 신문이나 TV를 본 후 제보 전화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각종 매체의 1면을 장식했던 그의 사진과 뉴스를 통해 적어도 한 번쯤은 그의 얼굴을 보았을 텐데 말이다.
이에 그라슬의 아버지인 요제프 그라슬(46)은 “우리 가족은 모두 농부들이다. 지난 2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꼭두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들판에 나가 바쁘게 일만 해왔다.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을 만큼 한가한 시간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가족들이 쉬쉬한 데는 사실 다른 이유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우선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시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점이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가족들이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는 이유였으며,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 ‘피아노맨’의 아버지 요제프 그라슬. | ||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런 환경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늘 바깥 세상으로의 탈출을 꿈꾸면서 “언젠가는 꼭 세상 밖으로 나가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일탈의 시작은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해방구였던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교 시절 학교 신문에 ‘스캣맨(Scatman)’이라는 필명으로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던 그는 그간 자신이 방송국 문을 두드렸다가 실패한 경험담을 신랄하고 위트 넘치는 필체로 써내려 갔으며, 지역 신문의 청소년 섹션에도 약 2년 동안 브리트니 스피어스, 헬무트 콜 등 유명인사들에 관한 풍자적인 칼럼을 썼다.
이밖에도 그는 당시 라디오 방송국이나 케이블 음악 방송국, 대형 신문사 등에 인턴 자리를 요청하거나 ‘퀴즈쇼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방송 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총명한 반면 거만함과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던 까닭에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왕따를 당했던 그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늘 혼자였다. 한편 담당 교사로부터 프랑스 유학을 적극 추천받을 정도로 유독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마침내 졸업 후 프랑스행을 결심했다.
마을을 떠나고 싶어했던 그에게 유학이란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이유도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고민하던 그는 동성애자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더 큰 도시로 나가고 싶어했다. 그러기에는 프랑스가 안성맞춤이었다.
졸업 후 잠시 장애인 보호소에서 자원봉사를 마친 그는 마침내 지난 3월 프랑스로 건너갔다. 포르닉이라는 작은 해변 휴양지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던 그는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정말 이 모든 게 다 쇼였을까 하는 것이다. 배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그가 왜 영국으로 건너갔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에 대해 그라슬의 변호사는 “지금 그는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는 상태다. 왜 배에 올라 탔는지 그리고 왜 물에 젖은 채 발견되었는지 본인 스스로도 당시의 상황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