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은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한 쌀 직불금 제도가 물의를 일으키자 참여정부 최대실정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기세다. | ||
사실 여권은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S라인’(서울시 인맥) 측근인 이 차관 때문에 직불금 사건이 도마에 올랐던 까닭에 ‘조용히 덮고 가자’는 분위기도 강했다. 하지만 홍준표 원내대표가 “공무원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정면대응에 나섰다. 비록 홍 대표가 그 뒤 “마녀사냥식의 대응은 안 될 것”이라고 한 발 뺐지만 여권발 직불금 사건은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 되고 말았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여권이 죽을 수도, 아니면 노무현 정권 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직불금 사건을 통해 자신의 팔을 내주고 ‘적군’의 목을 취할 수 있을까.
‘쌀 직불금 사건’은 애초부터 여권에게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 인맥’ 핵심 중 한 명으로 이 대통령의 시장 재임 시절 인사행정과장, 재무국장, 감사과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부처 차관직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여권은 이 대통령과 ‘특수관계’에 있는 이 차관이 쌀 직불금 부당 신청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자 그 처리를 두고 한동안 고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여권의 고민은 쌀 직불금의 부당 신청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고, 이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올해 초 ‘강부자 내각’에 대한 주변의 빗발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임을 보내다 뒤늦게 두 손을 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 대통령이 이 차관에 대한 경질 타이밍을 놓쳐 인사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을 것을 더 우려했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됐다. 이 차관에 대한 경질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쌀 직불금 부당 수령에 대한 공무원들의 기강 해이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분기점은 지난 10월 14일 한나라당 국정감사 점검회의에서였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 자리에서 이 차관 문제 처리에 대한 그 간의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언어로 기자들을 바쁘게 했다. 그는 ‘공무원의 쌀 소득보전 직불금 수령’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며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이 대리경작을 하면서 쌀 직불금을 타갔다면 형법상 사기죄다.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부정하게 받아간 돈은 국고로 환수하고 정도가 심한 부분은 형사처벌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특히 그는 “노무현 정권 때 감사원에서 한 ‘쌀 소득보전 직불금 관련 감사’를 살펴보니 이를 타 간 공무원이 엄청나게 많았고 공사 직원도 수천 명이었다. 공무원의 도덕적 해이가 극치에 달한 직불금 문제가 왜 은폐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권의 ‘일방적 악재’였던 이 차관의 쌀 직불금 부당 신청 문제를 노무현 정권의 최대 실정으로 부각시키며 국면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홍 대표가 의도했던 ‘참여정부 실정론’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직불금 부당 수령자 명단에 한나라당 의원 2명이 먼저 걸려들면서 오히려 한나라당에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것이다.
당의 한 중진의원은 “두 의원의 고의성 여부를 떠나 ‘한나라당은 역시 부자당이다’란 일반 국민들의 이미지만 강화하는 꼴이 됐다. 당으로선 점수를 많이 잃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들은 홍 대표의 ‘오버’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놓았다. 한 의원은 “당 안팎에 홍 원내대표가 너무 나간다는 지적이 있다. 이번에도 쌀 직불금 문제에 대한 정치적 유·불리를 충분히 따지지 않고 일단 칼만 빼든 꼴이다. 경제 위기에다 이런 모럴 해저드 사건까지 터져 민심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이번 사안이 국정감사를 뒤덮을 만한 사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홍 대표가 너무 확대해석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나 너무 과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리고 향후 여권 관계자가 더 드러날 경우 홍 대표가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홍 대표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다. 쌀 직불금 문제는 이봉화 차관이 ‘S라인’ 핵심 인사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고, 청와대에게도 부담이었다. 그런데 홍 대표가 수세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오히려 노무현 정권 실정론을 들고 정면 대응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켜 놓았다는 평가도 있다. 여당이 사회악 척결에 앞장서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한나라당도 충분히 개혁적일 수 있다’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홍 대표가 직불금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스탠스에 비해 두세 걸음 앞서나간 측면은 있지만 완전히 헛발질을 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도 그래서 나온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앞으로 직불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두고 보면 그 ‘해답’이 나올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직불금 문제를 두고 이 대통령이 드디어 그동안 숨겨온 ‘칼’을 뽑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홍 대표가 이 대통령의 의중을 알고 다소 앞서나간 점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칼을 한 번쯤 뺄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직불금 사건이라는 것이다.
▲ 쌀 직불금 부당 신청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봉화 차관(왼쪽)과 청계광장에서 항의집회를 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 연합뉴스 | ||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이 직불금 문제에 연루된 공무원들을 대거 ‘징계’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고 본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대한 상징적인 단죄, 그리고 정권 초기 솎아내지 못했던 친노 성향의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관계에도 ‘친이 그룹’을 심어놓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직불금 제도는 지난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때 처음 도입됐다. 그리고 현 정권 고위 공무원도 3명이 있긴 하지만 지난 2006년 기준으로 보면 무려 4만여 명의 공무원이 직불금을 수령한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감사원은 당시의 자료를 모두 폐기한 것으로 알려져 사건 은폐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는 현재 행정안전부 등을 통해 당시의 자료를 다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감사원의 쌀 직불금 부당 수령자 명단 비공개 결정 한 달여 전에 감사 결과를 사전에 서면 보고를 받은 것을 확인했다. 감사원의 비공개 결정에 윗선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했을 개연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감사결과가 확정됐던 지난해 7월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여권이 감사원 결과를 ‘뭉갰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노 전 대통령도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을 개연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은 직불금 사건을 ‘참여정부의 최대 실정’으로 보고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 “아직 정권 교체가 완전히 되지 않았다”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현재 국정감사에서 KBS 사장에 대한 견제, YTN 노조 사건 등으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도 이 대통령 입장에선 ‘방송 권력’이 여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 추종 세력에 넘어가 있다고 보는 시각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공무원 사회를 보는 인식과도 비슷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지만 현재의 고위공무원 대부분은 지난 10여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적군’이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 초기 청와대 관계자들은 “공무원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철학도 잘 전파되지 않아 답답하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 이런 시각은 지금도 상존한다. 하지만 공무원 입장에서도 이명박 정권에 불만이 많다. 인수위 시절 실세였던 한 인사는 정부 모 부처 고위급들을 ‘집합’시켜 놓고 이명박 정권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이 미흡하자 탁자를 탁 치면서 ‘그러니 당신들이 안 되는 것이다’라며 면박을 줘 당시 참석했던 공무원들이 황당해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명박 정권과 지난 정권 우산 아래 있던 고위 공무원들 간의 불협화음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 대통령도 이런 불편한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으로서도 개혁의 주요한 주체이자 ‘도구’인 공무원에 대한 전반적인 체질 개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공직 사회에 대한 명분 없는 사정 국면 조성은 필연적인 저항을 부른다.
그래서 이번 직불금 사태는 ‘안티 이명박’ 공무원 물갈이에 유용한 수단으로도 여겨진다. 여권으로서도 이번 사건을 통해 친노 성향의 공무원들을 대거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중용해 적체된 인사에도 숨통을 터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공직사회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통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명박’식 개혁을 해 나갈 지원군을 확보해나가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또한 직불금 부당 수령 연루자에 대한 정리는 정권 출범 초기에 비해 느슨해진 공직 기강을 바로 잡는 효과도 있다. 최근 청와대의 골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관계자들이 주말 골프를 즐겨 문제가 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청와대 출근 시간도 다소 느슨해졌다는 것은 정부 부처의 긴장감도 떨어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 대통령이 이번 직불금 사태를 엄정하게 처리한다면 관가에도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고 그것은 곧 이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 제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의 이러한 기대는 ‘일장춘몽’으로 그칠 수 있다. 직불금 사태가 노무현 정권 때 주로 발생한 일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도화선은 이봉화 차관으로 시작됐기 때문에 현 정권의 인사 실패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정 부각으로 반사이익을 얻는다는 발상은 지난 대선이 마지막이 됐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노무현 죽이기는 이제 그만 우려먹었으면 한다. 여론도 ‘정권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 그런 수준에 머무르고 있느냐’라는 질타도 많다”라는 비판도 나온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오버’해 이번 사건이 확대됐다는 시각도 당·청 간의 유기적인 정무 전략 부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지적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직불금 사건이 여권에게 아픈 것은, 금융 위기로 국민들의 경제 의욕이 전반적으로 상실된 가운데 또 다시 모럴 해저드 사건이 터지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고스란히 이명박 대통령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