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기쁨조’ 출신 중국인 무용수의 누드집을 소개한 <주간겐다이> 지면. | ||
그의 이름은 자오샨샨(趙珊珊). 198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한의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는 중국인 가수였다. 1986년 가족 11명이 중국으로 귀화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명문 북경무용학원에 진학, 무용대회에서 입상했다. 그가 일본의 대중지 ‘주간겐다이’ 최근호에 ‘기쁨조’ 생활을 털어놓았다.
나는 발레리나로 ‘기쁨조’에서 1년 동안 김정일 앞에서 춤을 췄다. 처음 춤춘 것은 1998년 11월로 약 두 시간 동안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을 선보였다. 김정일은 나의 춤에 박수를 보내며 나를 자신의 옆으로 불러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이런 영예를 입은 외국인 댄서는 아마도 나 하나뿐일 것이다.
1998년 10월 김정일의 요청을 받은 북경무용학원의 명으로 나는 두 사람의 동급생과 함께 평양으로 건너갔다. 내가 배속된 곳은 ‘연변가무단’. 북한인 댄서 20명과 러시아인 댄서 15명이 있었다. 모두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들이었다. 나는 중국어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연변가무단이 기쁨조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일본에서 생활하게 된 후였다.
13년에 걸쳐 김정일의 요리사로 지냈고 기쁨조 출신 가수와 결혼한 후지모토 겐지씨는 “기쁨조는 김정일의 명을 받아 1984년에 결성된 미녀군단이다. 매년 북한 전역에서 신분이 높은 집안의 미녀들을 모아 키에 따라 160cm 이하, 160~165cm, 165cm 이상으로 나눈다. 러시아인 댄서는 본 적이 있지만, 중국인 댄서도 있다는 건 몰랐다. 김정일이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건 160cm 이하의 그룹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나와 연변가무단원들은 군인들이 엄중하게 경비를 서는 숙소를 할당받았다. 북한인 책임자가 “앞으로 1년 동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용연습을 한 지 한 달쯤 되자 코치가 “지금까지 연습한 성과를 오늘밤 선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저녁에 모두들 공연용 의상으로 갈아입고 검은 고급 차에 나눠 타고 숙소를 나섰다.
처음으로 보는 평양의 중심부는 겨울의 어둠에 덮여 어딘지 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중 유난히 화려한 6층짜리 건물 안으로 우리가 탄 차가 들어갔다. 우리는 휘황찬란한 연회장으로 안내됐다. 안에는 10명이 앉을 수 있는 원탁이 다섯 개 있었고, 북한의 최고 간부들이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를 통해 그들이 고위 간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댄서들이 단상에서 군무를 선보인 후 내가 단독공연을 했다. 두 시간에 이르는 공연이 끝나자 가장 앞의 원탁 중앙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 오른손을 들었다. 그 남자는 통통한 풍채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오른손을 든 모습이 마오쩌둥과 똑같았다. 내가 솔로댄스를 춘 탓인지 나 혼자만 그 남자의 맞은편 자리로 안내되었다. 다른 중국인 댄서들은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그 남자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눈치 챘지만 설마 김정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의 인민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앞에는 중국의 유명한 술과 한국의 진로 소주가 있었다. 이날 김정일은 기분이 좋은지 내 춤솜씨를 몇 번이고 칭찬했다. 그리곤 술을 권했지만 내가 못 마신다고 하자 강요하진 않았다. 테이블에는 숙소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김정일은 술 대신에 불고기나 냉면, 김치 등을 권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
나는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대화에 끼지 못 하고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이 김정일에게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중국인 댄서들은 식사가 끝난 후 숙소로 돌아왔지만 북한인 댄서들은 남아야 했다.
그 후로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김정일이 주최하는 연회에 불려 나갔다. 두 시간 정도의 공연이 끝나면 김정일은 늘 나를 자신의 테이블로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그는 우리 중국인 댄서들에게 무척이나 신사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 댄서들의 야한 차림에 나까지 얼굴이 빨개진 적은 있었다.
지난 95년 남한으로 귀순한 ‘기쁨조’ 출신 신영희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술에 취한 김정일의 명령으로 우리는 외설스러운 춤을 춰야 했다. 일단 기쁨조 ‘곡예단’이 브래지어로 가슴을 가린 채 빨간 숄을 두르고 춤을 췄다. 팬티도 입지 않고 다리를 올리거나 허리를 비트는 요염한 동작을 반복한 후, 브래지어를 벗고 다시 춤을 췄다. 기쁨조의 ‘백두산조’는 조끼 밑에 브래지어만 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하반신은 앞부분만 겨우 가렸을 뿐 엉덩이는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음란한 행위를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춤을 췄다. 춤은 점점 더 과격해졌다. 한번은 김정일이 직접 공장까지 가서 만들게 한 특제 속옷을 입고 속옷 패션쇼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전라로 춤을 추게 됐다. 우리들 대부분은 연회가 끝난 후 최고 간부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들의 정부(情婦)가 됐다.”
우리는 처음 약속대로 1999년 9월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돌아갈 때 한 사람당 약 50만엔(약 4백25만원)의 사례비를 받았다. 결국 1년이나 평양에서 생활하면서 숙소와 연습장, 김정일의 연회장밖에 모르는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게 된 것이다.
자오샨샨은 어머니가 일본인과 재혼하면서 몇 군데의 무용단을 거쳐 2004년 일본에 가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 ‘나무(裸舞)’라는 올 누드 사진집을 낼 예정이다. 그녀는 “김정일 앞에서 춤을 출 때의 긴장감에 비하면 누드 촬영은 오히려 쉬웠다”고 이야기한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