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바로 수확한 감자가 맛이 기막히다며 가져다주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인 그는 특이한 인생경력의 소유자였다. 신학대학을 나와 칠십년 대 시절 영등포의 공장지역 노동자로 들어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 다음 사역지는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이었다. 광부들과 함께 막장을 오르내리며 그는 진리를 전했다.
그의 부인은 유신시절 정부에 대항한 유명한 여성노조위원장이었다. 그는 교회가 부자보다 그리스도의 편에 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자 약한 자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인터넷신문을 만들어 기성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대형교회들은 예수를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속에 가두어 두고 신자들이 일주일에 한번씩만 면회를 오게 한다고 했다. 대리석 제단위의 금 십자가가 예수라는 상품명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패한 목사와 장로들을 정면으로 ‘똥개’라고까지 하면서 꾸짖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인 돈에 무릎을 꿇지 않고 사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나이 먹은 아내가 슈퍼에 나가 소리치면서 물건들을 팔고 있다. 부부가 틈틈이 남의 밭을 빌려 감자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노동의 댓가로 먹고 살면서 소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 부부에게 다가오는 것은 비난과 고소와 법정이었다. 그는 돈이 없었다. 낯선 법정은 그에게 광야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의 변호인이 되어 주었다. 그는 변호사가 없이 스스로를 홀로 변호하겠다고 했다. 미안함과 개결한 자존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오히려 늙은 변호사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고 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이런 게 변호사직업의 묘미였다. 내가 가진 얼마의 지식과 시간과 에너지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제공하는 것이다.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공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나의 공물을 절대로 그냥 받는 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몇 십배 몇 백배의 희열로 내게 돌려주시곤 했다.
이십년 전 청송교도소에 쳐 박힌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무기력한 죄수의 변호를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개보다 못한 인권유린의 현실이었다. 나는 말로 글로 그 상황을 세상에 폭로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서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언론이 그 사실을 알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세상이 교도소 내부의 인권유린에 약간의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 청계산자락의 음식점에서 등산을 마친 후 검찰과 법원의 법조계 선배들과의 회식자리에서였다. 검찰고위직에 있다가 나온 선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주 실망했어. 네가 재심을 청구한 놈은 범죄인 중에 나쁜 엑기스만 뽑아 논 놈이야. 너는 그 교활한 놈한테 농락당하는 거야.”
그 선배는 내가 재심을 신청한 당사자를 기소한 담당검사였다. 판사를 하는 다른 선배들의 눈빛에서도 마땅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나는 기존 틀을 벗어난 튀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식이 끝나고 법조계선배들이 다 일어서 문 쪽으로 나갈 때였다. 고기 굽는 숯불을 나르던 청년이 갑자기 다가와 순간 앞에 무릎을 꿇고 내게 말했다.
“신문에서 그 사건 얘기를 봤습니다. 저는 저런 높은 새끼들 보다 진짜 약하고 소외된 저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일해 주는 분을 존경합니다. 제가 그 죄수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그 청년은 정중하게 머리를 수그리며 인사했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 청년이 내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십년이 흘렀다. 낮에 변호료대신 온 감자가 버터와 함께 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가 허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데서 돌아오는 충만감과 영혼의 환희는 대단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