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 없는 삐라 지난 10월 대북 민간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삐라를 풍선에 달아 북측으로 날리고 있다. 이날 행사에선 미화 1달러와 중국 10위엔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런 가운데 삐라 살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북한은 ‘개성공단 폐쇄’와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극단적 카드로 우리나라 정부를 압박하고 있어 사태가 쉽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삐라 살포’ 문제가 단지 정부와 보수단체 간의 일시적인 마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전망. 과연 이 국경을 넘나드는 ‘종이폭탄’을 둘러싼 미묘한 논란의 끝은 어디일까. 이명박 정부와 보수단체, 그리고 북한이 얽히고설킨 ‘삐라 전쟁’ 막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삐라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지난 10월 2일. 북한이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우리나라 민간단체들의 삐라 살포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문제가 표면화됐다. 북측은 이날 회담에서 개성공단 사업과 개성관광 중단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삐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어 8일 북측의 이 같은 압박에 통일부는 “해당 단체들에 자제를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해당 민간단체들은 정부의 자제 요청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나라사랑실천운동·자유수호국민연합·북한해방동맹 등 6개 시민단체는 통일부가 있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삐라를 금지하는 통일부는 통일의 장애물”이라며 항의했다. 그리고 이어 27일에는 북한에 10만여 장의 삐라 살포를 강행하면서 정부와의 마찰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북한 측은 점점 압박의 수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북한 측 남북군사회담 대표는 10월 28일 “이대로 가다가는 남북 관계를 전면 차단할 수 있다”고 통보했고, 지난 11월 12일에는 “12월 1일부터 1차적으로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단도 지난 13일 “삐라 살포를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북한이 군사회담을 열어서 남한의 삐라 살포를 중단하라고 요구할 정도로 대북 삐라는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 위협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6·25 전쟁 이전의 삐라를 비롯해 500여 장 넘는 역사 현장 속의 삐라를 수집해온 정선 아리랑학교 진용선 연구소장은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삐라는 탈북자들이 남한에 넘어와 겪은 상황이 담긴 생생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파급 효과가 매우 크다”며 “북한의 주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북한 정부가 더 민감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실제로 탈북자들 중 상당수가 북한에 살고 있을 당시 남쪽으로부터 넘어온 삐라로 인해 남한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이들 단체가 지속적으로 북한에 삐라를 보내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들 단체들이 최근 북한에 날려 보낸 삐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과 은밀한 가족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어 북측이 더욱 발끈하고 나섰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모임연합회는 지난 20일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 일대에서 ‘6·25 전쟁의 진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계도와 건강이상설’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삐라 10만 장을 북한으로 보낸 바 있다.
그동안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한 내부에서는 90년대 중반 식량난을 거치면서 삐라 사건이 종종 일어났었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는 북한 내의 ‘반 김일성’ ‘반 김정일’ 체제가 벌이고 있는 사건이기에 북한 정부가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
지난 2006년 2월에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있었던 삐라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온성군 소재 왕재산에 ‘김정일을 거꾸로 세우자’라고 적힌 삐라 수십 장이 뿌려져 북한 당국의 단속이 강화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왕재산은 김일성의 항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동상과 사적지가 건설된 곳. 북한은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북한 내 휴대폰 통화를 두절시키는 등 주민 단속을 철저히 했었다. 이밖에도 2004년 11월의 북한 내 반체제 조직인 ‘자유청년동지회 책임자 명의의 김정일 타도 육성 동영상 유출사건’, 2003년 4월 함흥 대극장 반 김정일 구호사건 등 반 김정일 단체 활동이 종종 벌어지고 있어 북한은 남한발 삐라로 인해 이와 같은 반체제 활동이 활발해질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6일 오전 개성공단에 들이닥친 김영철 남북 장성급회담 북측 단장 일행이 “어제 (남측 민간단체가) 삐라 10만 장을 뿌린 것을 알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 불똥이 튈 것”이라는 ‘위협적’인 발언을 한 것 역시 북한이 삐라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여기고 있는지 방증한다.
하지만 탈북자 및 민간단체들은 남한의 실상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정부가 오히려 이를 막고 있다며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북한민주화운동 박상학 대표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서라도 통일부는 대북 삐라를 지원해야 한다. 또 남한의 통일부가 김정일 집단에게 북한 언론을 통해 대북삐라가 담은 진실을 북한 동포들에게 전파하라고 요구해야 정상적인 남한정부 기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정부가 북한의 요구에 대해 ‘저자세’로 나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 보수단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올인코리아 조영환 대표는 “통일부는 북한의 요구는 남한에서 전부 관철시키고 남한의 요구는 북한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며서 “대북삐라는 통일부가 해야 할 일인데 탈북자들과 민간단체들이 대신하고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현재 정부는 남북관계의 파탄을 막기 위해 삐라에 대한 북한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통일부는 북한이 ‘남북 관계 전면 차단 가능성’을 언급하자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 자제를 요청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11월 13일에는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직접 “적극적으로 어떻게든 단속, 자제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삐라 살포 자제 요청에도 민간단체들이 몇 차례 삐라 수만 장의 살포를 강행하는 등 의지를 굽히지 앉자 정부는 법적인 제재조치도 강구하고 있다. 그러나 ‘삐라 풍선’ 살포에 대한 제재 수단으로 거론되던 고압가스안전관리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의 적용은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으로 결론 난 상황이다. 특히 고압가스 안전관리법을 적용하겠다는 다소 ‘황당한’ 정부 방침에 대해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3일이면 관련 자격증을 딸 수가 있는데 그 뒤에는 우리를 어떻게 막을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정부가 삐라 살포 중단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근거는 지난 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4년 남북장성급회담 합의서다. 이 합의서에는 남북 간 ‘상대방 정부 비방 중상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으며 ‘방송과 게시물, 전단 등을 통한 모든 선전활동을 중지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정부는 “북측은 지금까지 이 합의를 잘 지키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박상학 대표는 “2004년부터 계속해서 전단을 북으로 보내왔는데 막으려면 그때부터 막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남북관계가 악화된 것을 삐라 살포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억지라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삐라 살포를 막는 정부에게 보다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대북협상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삐라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압박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살포를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일단 3개월간 삐라 살포 중단을 결정했다. 북한과 보수 민간단체 사이에 끼어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진퇴양난의 현안을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