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인 건평 씨를 구속(12월 4일)한 검찰은 박연차 회장에 대한 사법처리에도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다만 검찰은 노건평 씨의 경우 청탁 라인이 드러난 비교적 단순한 사건인 반면 박 회장은 각종 비리 의혹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막바지 보강수사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농협과 관련된 박 회장의 각종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는 검찰 수사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 박 회장은 2005년 6~8월 세종증권 주식 197만 주를 매집했다가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가 현실화된 그 해 말 전량 매도해 178억 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또 2006년 6월 농협 자회사인 휴켐스를 양해각서 체결 때보다 322억 원 낮은 가격으로 인수해 특혜 의혹도 받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이 휴켐스 인수 때 세종증권 주식 차익으로 얻은 자금 중 상당 부분을 사용한 사실도 확인한 상태다.
검찰은 박 회장이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직접 금품로비를 벌였을 가능성과 정 전 회장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당시 여권 실세들에게 로비를 전개했을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물증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검찰은 또 박 회장과 정 전 회장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20억 원이 오간 흔적이 발견된 만큼 주식 매집 및 기업 인수와 관련한 대가성 여부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의 탈세 의혹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물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 회장이 2002~2005년 홍콩 법인에서 받은 800여억 원의 개인 배당금에 대한 소득세를 탈루한 정황을 잡고 국세청에서 자료를 넘겨받아 사실 확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 회장도 탈세 의혹에 대해서는 일부 혐의를 시인하고 있어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란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또 박 회장이 노건평 씨와 오랜 세월 친분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차례 도움을 준 사실에 비춰볼 때 노건평 씨나 권력 주변 인사들이 이들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세종증권 주식 거래로 200억대가 넘는 시세차익을 본 박 회장이 미공개 정보이용 의혹을 덮기 위해 증권거래소 측에 조사 무마를 시도했는지 여부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검찰은 드러난 혐의만으로도 박 회장을 사법처리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검찰 수사가 박 회장의 개인비리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이라며 “박 회장의 신병이 확보되면 드러난 혐의를 파헤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비자금 사건 등으로 전선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로 검찰은 박 회장이 10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잡고 구체적인 비자금 규모와 용처를 파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박 회장에 대한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될 경우 참여정부 당시 정권 실세를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에게 불똥이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박 회장의 비자금 규모와 그가 여야를 망라하는 마당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연차 사건이 A급 태풍으로 부상할 것이란 관측이 나돌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박 회장은 주요 선거 때 여야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등 정가에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노 전 대통령 측근들과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후원이 집중됐다. 박 회장은 2002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에게 7억 원의 불법 자금을 제공했다가 벌금 3000만 원을 선고받은 바 있고, 2006년 5·31 지방선거 과정에서는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회사 임직원과 가족들 명의로 300만~500만 원을 후원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약식기소되기도 했다.
박 회장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열린우리당 전·현직 의원들은 16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박 회장이 개인적으로 후원한 인사는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과 김우남 의원, 윤원호 김교흥 김명자 전 의원 등이다. 또 태광실업 임직원과 가족 명의로 정치후원금을 받은 인사는 민주당 이광재 조경태 박병석 김재윤 김종률 변재일 의원, 이화영 조성래 김형주 이근식 유필우 전 의원 등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5·31 지방선거 당시 열린우리당의 핵심 간부였던 K 전 의원은 박 회장에게 ‘젊은 정치인들을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박 회장 비자금 사건이 수면 위로 부상할 경우 또 다른 뇌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은 사업장이 부산·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역 한나라당 정치인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나눠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2002년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 재정위원을 지내면서 특별당비로 10억 원을 낸 바 있고, 휴켐스를 인수한 직후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C 씨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들은 정치지향적인 박 회장의 사업 스타일에 미뤄 박 회장이 전·현 정권 실세들에게 보험성 정치자금을 지원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 주변에서는 참여정부 386세대 정치인을 비롯해 부산·경남 지역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들이 박 회장의 정치 비자금에 연루돼 있을 것이란 내용의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박 회장에 대한 비자금 수사망에 여야 거물급이 걸려들 수 있다는 소리도 나돌고 있다.
검찰은 태광실업 등 관계사와 박 회장과 관련된 계좌를 전 방위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박 회장이 S 증권 김해지점 등을 통해 여러 차명증권 계좌를 개설·운용해온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박 회장이 이들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용처를 파헤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박 회장이 홍콩 유령회사와 해외법인들 간의 허위거래로 조성한 800억 원의 비자금 차명계좌에서 특정 시기에 매일 수천만 원씩의 현금이 집중적으로 인출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박 회장은 참여정부 시절 특정 시기에 자신의 비자금 관리 계좌에서 매일 수천만 원씩, 일주일에 수억 원의 현금을 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박 회장이 왜 이런 방법으로 돈을 인출했고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따라서 검찰 수사 추이에 따라 박 회장과 참여정부 실세들의 불법 정치자금 거래 의혹이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 수사가 자신의 비리 혐의를 넘어 정치 비자금 사건으로 확대될 조짐이 일고 있지만 박 회장은 이러한 의혹을 일축했다. 12월 4일 자신의 기내난동 혐의에 대한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지법에 출두한 박 회장은 거액의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비자금을 조성한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박 회장의 혐의와 검찰의 강력한 사정 의지 등을 감안할 때 박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는 것을 신호탄으로 검찰의 사정 칼날은 정치권으로 향하게 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대형 폭풍우를 동반한 ‘박연차 리스트’에 여의도 정치권은 한동안 잠 못 드는 겨울밤을 보내야 할 것 같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