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램지 살해사건 용의자로 붙잡힌 존 마크 카. 그는 범행을 자백했지만 진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로이터/연합뉴스 | ||
지난 1996년 리틀 미스 콜로라도 출신의 여섯 살 소녀 존베넷 램지 양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존 마크 카(41)라는 전직 교사 출신의 남성. 하지만 이 사건이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어린 소녀를 무참히 살해한 사건 자체도 끔찍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사 당시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존베넷의 부모였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간 콜로라도 경찰과 검사는 줄곧 아버지 존과 어머니 팻시를 가해자로 지목한 채 수사를 펼쳤으며, 언론들도 하나 같이 이를 확신하는 듯 온갖 비난성 글과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짜내는 데 바빴다. 자식을 살해한 누명을 쓴 채 10년 가까이 마음 고생을 했던 램지 부부에게 있어 이번 용의자 검거는 누구보다도 반가운 소식일 터. 하지만 불행히도 엄마인 팻시 램지는 지난 6월 오랫동안 앓아왔던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나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현재 미국으로 신병이 인도돼 조사를 받고 있는 카는 미국에서 범행을 저지른 직후 유럽 및 남미, 아시아 등을 전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미 조지아주 코니어스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이런 자신의 이력을 이용해 주로 어린이 영어 강사로 활동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가 지난 2001년 서울의 한 어린이 어학원에서도 영어강사로 2개월 동안 일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명 ‘리틀 미스 콜로라도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어떻게 발생했던 걸까. 우선 사건이 발생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난 1996년 12월 25일. 콜로라도 볼더에 거주하고 있던 램지 가족은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성탄절 연휴를 보내고 있었다. 근처 친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온 가족은 다음날 아침 일찍 미시간으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던 터라 모두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램지 부부가 차 안에서 잠이 들었던 존베넷을 침대에 눕힌 시각은 9시 30분경. 그리고 잠시 후 램지 부부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5시 무렵 잠에서 깬 팻시는 부엌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수상한 편지가 계단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장 반 분량의 편지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딸을 납치했으니 다음날까지 몸값 11만 8000달러(약 1억 1300만 원)를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팻시는 즉시 남편 존을 깨우고 911에 신고를 했다. 911에 접수된 신고 시각은 오전 5시 25분 무렵.
이어 램지 부부는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으며,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수십 명의 지인들이 속속 램지 부부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한편 경찰이 램지 부부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전 6시가 조금 안 됐을 무렵이었으며, 담당 형사는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도착했다.
당시 램지 부부의 집을 수색했던 경찰은 지하실 창문이 깨져 있는 것 외에는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 창문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깨져 있던 것으로 사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렇게 납치범의 전화를 기다리던 오후 1시 무렵. “혹시 집안에 ‘수상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살펴 보라”는 담당 형사의 요청에 따라 존과 친구들이 집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살핀 곳은 지하실이었다. 놀랍게도 존과 친구들은 지하실의 와인창고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담요에 덮여 있는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존베넷의 시체였으며, 발견 시각은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발견된 시체의 모습은 끔찍했다. 두 손은 전선줄에 묶인 채 머리 위로 들어올려져 있었으며, 꽁꽁 묶었던 듯 허리에도 밧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또한 입에는 배관용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머리에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상처가 있었으며 옷은 그대로 입은 채였다.
저녁 8시쯤 검시관이 도착했고, 이틀 후 부검 결과가 발표됐다. 사인은 질식사 및 두개골 파열이었다.
이 살인 사건은 곧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존베넷이 리틀 미스 콜로라도 출신의 예쁘장한 소녀인 데다가 보통 납치 사건과 달리 희생자의 시체가 다른 곳도 아닌 자택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 지난 1998년 한 심령술사가 작성한 용의자 몽타주. 용의자 존 마크 카의 얼굴과 매우 비슷하다. | ||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사건 직후 집안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 현장을 봉쇄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이웃주민들과 친구들이 여러 시간 동안 마음대로 집안을 드나들었다는 점 등이었다.
한편 볼더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램지 부부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첫째, 시체가 자택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둘째, 집 근처에서 낯선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외부인이 아닌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셋째, 집안 침입 흔적이 없었다는 점, 넷째, 램지 부부가 경찰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점, 다섯째, 램지 부부가 고의로 수사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언론도 경찰의 편을 들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지역 신문들은 하나같이 램지 부부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기사를 쏟아 냈으며, 볼더 시장도 TV와의 인터뷰를 통해 “분명히 외부인의 소행이 아니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로 보아 집안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이다”면서 거들고 나섰다.
램지 부부가 딸을 살해했다는 괴소문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이 되어갔다. 미스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인 미모의 팻시가 돈 많은 사업가인 존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점도 이런 괴소문이 퍼지는 데 한몫했다.
첫 번째 괴소문은 존이 딸을 성폭행한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경찰은 지난 97년 램지 부부의 집에서 아동포르노 자료를 찾기 위해 수색영장을 발부했는가 하면 심지어 그가 시내 포르노 가게에 자주 들렀다는 허위 제보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에 존은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절대로 내 딸 존베넷을 죽이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이미 언론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두 번째 괴소문은 이불에 오줌을 싼 존베넷을 본 팻시가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존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소문이었다. 자신이 존의 정부라고 주장했던 킴벌리 발라드라는 여성은 TV 인터뷰를 통해 “실제 존이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가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에 존은 자신의 외도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발라드라는 여성을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찰과 검찰, 그리고 모든 언론이 마치 합심한 듯 램지 부부를 범인으로 몰아 세웠다. 하지만 램지 부부는 자신들의 결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들은 즉시 변호사를 선임했으며, TV에 출연해서 “살인마가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지만 볼더 시민들에게 말하고 싶다. ‘자녀들을 꼭 곁에 두고 있으라’고 말이다”면서 딸의 살인범을 찾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경찰이 램지 부부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데는 사실 한계가 있었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 결정적으로 지난 2003년 존베넷의 손톱과 팬티에서 채취한 DNA가 램지 가족이 아닌 제3자의 것이라는 분석결과가 나와 경찰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었다.
결국 2003년 연방법원 판사가 경찰과 FBI의 수사가 엉성하다면서 사건을 폐기토록 결정하자 이 사건은 아무도 기소하지 못한 채 미제로 남고 말았다.
또한 현장에서 발견된 수상한 점들이 뒤늦게 속속 드러나면서 외부인의 소행일 가능성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사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외부인이 저지른 범행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앞서 말한 존베넷의 손톱과 팬티에서 채취된 혈흔 및 DNA 검사 결과였다. 이 DNA는 램지 부부와 일치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제3자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였다.
또한 경찰의 발표와 달리 외부인이 집안에 침입했던 흔적은 의외로 많았다. 시체가 발견된 와인창고의 바닥에서 낯선 부츠 자국이 발견되었는가 하면 문에도 수상한 사람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발견됐다. 또한 존베넷을 감싸고 있던 담요 위에서 발견된 남성의 음부 털도 조사 결과 램지 가족의 것이 아니었다.
▲ 숨진 존베넷 램지 양(오른쪽)과 존베넷의 부모 존과 팻지 램지. 엄마 팻지는 지난 6월 난소암으로 숨졌다. | ||
수사팀의 일원이던 루 스미스의 주장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당시 램지 부부에게 살해 동기가 없다고 주장한 그는 외부인의 소행임을 확신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램지 가족의 집 근처에서 발견된 강철 야구 배트에서 채취한 섬유가 지하실 카펫의 섬유와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범행이 일어난 비슷한 시각에 램지 가족의 집 주변에 낯선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는 점, 존베넷이 죽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산타클로스가 깜짝 방문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램지 부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 깨진 지하실 창문 아래에서 낙엽과 창틀에서 떨어진 파편 등이 발견된 점, 또한 이 파편이 시체가 발견된 와인창고에서도 발견된 점, 존베넷의 몸에서 발견된 수상한 스턴 총 자국,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의 필체가 램지 부부의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었다.
이처럼 여러 정황을 따졌을 때 사건은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되었다. 깨진 지하실 창문으로 침입한 범인이 존베넷의 침실로 들어가 스턴 총을 이용해 전기 쇼크로 근육을 마비시킨 후 강제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성폭행한 후 살해했다는 것이다. 혹은 부검 결과 존베넷의 위에서 채 소화되지 않은 파인애플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살해 전 먹을 것을 주겠다며 먼저 부엌으로 유혹한 다음 지하실로 데리고 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나리오가 맞다면 용의자는 집안 구조를 잘 알고 있으며, 좁은 지하실 창문으로 드나들 만큼 체구가 작으며, 범죄를 저지르고도 장문의 편지를 쓰고 갈 만큼 침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직 FBI 수사관이었던 로버트 레슬리는 램지 가족과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했다. 특히 몸값으로 요구한 액수가 존이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받은 액수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사실 용의선상에 올라야 할 사람은 매우 많았다. 램지 가족의 집에 드나들던 친구나 친척, 직장 동료까지 합하면 수백 명이 넘는 데다 당시 집안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인부들까지 집을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검거된 카는 과연 진범이 맞을까. 그는 체포된 직후 본인 스스로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모에 반해서 납치했다고 말한 그는 “존베넷을 사랑했고, 납치 과정에서 사고로 죽었다”면서 계획된 살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진범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수상한 점이 많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다. 무엇보다도 그의 진술이 범행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카는 범행 당일 램지를 학교에서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고 자백했지만 그날은 성탄절 연휴 기간이라 학교는 방학 중이었다. 또한 존베넷에게 마약을 투여한 후 성폭행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당시 존베넷의 질 주위에는 약간의 찰과상만 있었을 뿐 정액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마약의 흔적 역시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의 전처가 사건 당일 카가 자신과 함께 앨라배마에서 성탄절을 보냈다고 증언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또한 “전 남편은 램지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건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카가 어떻게 존베넷을 알게 됐는지도 전혀 알려진 게 없다. 그가 팻시에게 여러 차례 만나 달라며 이메일을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존은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카는 체포된 후 어떻게 집에 침입했느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거부해 의심을 받았다.
더구나 카는 램지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작성한 마이클 트레이시 교수에게 최근 수년간 익명으로 수백 통의 이메일을 보내 자신이 범인임을 시사했고 트레이시 교수가 이 사실을 지난 5월 수사팀에 알림으로써 덜미가 잡혔다.
물론 DNA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경찰은 그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허위 자백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지난 1998년 한 심령술사가 작성한 용의자의 몽타주와 카의 인상이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램지 부부는 범인을 찾는 데 이 몽타주를 적극 활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과연 카의 체포로 10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사건이 마침내 종결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늦게나마 램지 부부가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