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경주를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가에서는 이날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두고 경주 재보궐 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친이 측에 대한 경고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지난 11일 경주를 찾은 것이 이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라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최근 ‘계파 전쟁에 매몰될 수 있다’라는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선 경선 때 안보특보를 지낸 정수성 씨의 경주 출판기념회 참석을 강행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은 “그의 경주행은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세력이 지난 총선 때 잘못된 공천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경고성 메시지”라고 말한다. 이로써 여권 일각에서 제기되던 ‘박근혜 역할론’은 이미 소멸됐고, 친이-친박의 화합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 움직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전 대표가 강공 모드로 급선회한 배경을 추적해보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옛 참모들이 다시 바빠지고 있다.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박 전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친박그룹의 핵심 브레인들은 그동안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향후 전략을 수립해왔다. 하지만 최근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친이그룹 일각에서 ‘박근혜 역할론’을 계속 제기하며 공세를 펼치자 그 대응차원에서 회의 횟수를 크게 늘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관계자 A 씨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를 모셨던 대부분의 전략 관계자들은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동안 특보단 회의는 자주 열리지 않았지만 최근 ‘박근혜 역할론’이 계속 제기되고, 내년 초 여권 개편과 맞물려 현안에 대응할 필요성이 커져 회의 횟수도 주 1~2회로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 측 진영에는 여권의 개편 시나리오에 대해 엇갈린 시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내년 초 예상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여권 개각에 대해 ‘명분을 주고 지켜보자’라는 의견과 ‘화합 의사는 전혀 없는 만큼 우리 갈 길을 계속 가자’라는 견해가 충돌하고 있는 것.
앞서의 관계자 A 씨는 “당내 화합과 경제위기 극복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사소한 갈등도 만들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주 재·보궐 선거에 친박그룹이 공천 신청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양보를 하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도 화합을 위한 제스처를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하지 않겠나.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친박그룹 내부의 ‘단계적 화합론’은 소수의 목소리에 그치고 있다. 친박그룹 대부분은 “양측의 화학적 결합은 이미 물 건너갔다”라고 본다. 지난 경선 때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전략수립 업무를 맡았던 B 씨는 ‘박근혜 역할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역대 정당사에서 우리 같은 비주류가 현재의 주류에 이처럼 협조하는 경우가 있었느냐. 우리가 한 개의 법안 처리도 비협조를 한 적이 있었느냐. ‘박근혜 역할론’이 계속 나오는데 만약 박 전 대표가 현안에 대해 언급하며 나서는 순간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로 향할 텐데 이 대통령이 그런 순간을 견딜 수 있겠느냐. 우리는 저쪽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식으로 도와달라는 구체적인 제안이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 모든 게 말로만 떠돌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가만히 있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박 전 대표는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친박그룹 내부의 강경 기류는 최근 박 전 대표의 행보에 그대로 드러난다. 먼저 박 전 대표가 경주행을 택한 것에 대해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만의 방식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한다. 일각에서는 더 나아가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앞서의 전략 관계자 B 씨는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의 경주행을 두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주려는 특유의 원칙주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좀 밋밋하다고 본다. 박 전 대표는 경주행을 통해 이 대통령과 친이그룹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총선 때 현 주류 세력이 공천을 잘못해 국민통합을 깼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위기 극복도 더욱 어렵게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친박그룹 일부에서 계파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반대를 했지만 박 전 대표는 지난 총선 이후 일관되게 ‘모든 당내 갈등의 근원이 공천 전횡에서 빚어졌다’는 메시지를 이 대통령에게 또 다시 던진 것이다. 특히, 당시 사무부총장이었던 정종복 전 의원도 공천을 주도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기 때문에 그가 만약 경주 재·보궐선거에 출마를 할 경우 잘못된 공천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왜 그동안의 ‘정중동’ 행보에서 벗어나 친이그룹과 맞서며 강경책을 주도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를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접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박 전 대표가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친박그룹의 입각설에 대해 ‘전혀 근거도 없는 낭설’이라는 판단을 했고 더 이상의 양측 화합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선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무성 의원이 긴급회동을 한 것을 두고 양측의 화해를 조율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해석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의 관계자들은 이 회동에 대해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앞서의 친박그룹 관계자 A 씨는 이에 대해 “양측 화합을 위한 실질적인 대화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개각에 대해서도 구체적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맹 수석이 이 대통령에게 ‘이런 일 하고 다닌다’라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만든 ‘쇼’에 우리가 이용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대통령이 여권 개편을 추진하면서 친박그룹도 포용할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친박그룹 관계자 B 씨는 이에 대해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난 인사들이 우리에게 전화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친박 인사 입각은 전혀 없을 것’이라더라. 어떤 사람은 입각설에 대해 ‘개꿈 꾸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 친박 인사들이 입각할 것이라고 하는 전망도 있지만 우리는 ‘완전히 기대를 접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본인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고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자신이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주변에 전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사실 친이 세력은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박근혜 역할론’을 흘리며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무책임하다’며 공세를 퍼부었다. 유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아 박 전 대표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를 압박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친이 세력의 역할론 주장이 구두선에 그치는 정치적 공세라고 규정하고 향후 적극적으로 대응할 태세다. 특히 박 전 대표 측은 경제위기 탈출이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로 친이 세력의 잘못된 총선 공천을 들고 있다. 당시의 잘못된 공천이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국민통합이 깨지면서 경제위기 탈출의 동력도 약해지고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는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을 일종의 ‘압박전술’로 보는 관측도 있다. 내년 개각과 맞물려 이 대통령이 친박그룹과의 화합책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도 “그런 정치적 해석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대통령에게서 모든 기대를 접었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박 전 대표의 벼랑 끝 전술은 이제 친이-친박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어야 하는 이 대통령으로서는 ‘박근혜’라는 눈앞의 거대한 고개가 더욱 깊고 가파르게 느껴질 만도 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