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랑하니까 괜찮아>의 한 장면. | ||
지난 10월 중순 일본의 여대생 A 씨는 좀처럼 감기가 낫지 않아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38℃를 넘는 고열이 열흘도 넘게 계속되고 있었지만 감기약으론 효과가 없었다. 근처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목이 부어오르고 음식도 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걱정이 된 부모가 A 씨를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혈액검사를 받게 했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키스병’이라는 감염증에 걸린 것.
다음은 전문의의 설명이다. “키스병 즉 ‘전염성 단핵증’을 일으키는 EB바이러스는 사람의 타액을 통해 감염된다. 한번 감염되면 평생 체내에 남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키스를 할 때마다 이 바이러스는 쉽게 옮겨가게 된다. 증상은 감기와 닮아서 40℃ 전후의 고열과 두통, 식욕부진, 임파선 부종, 목에서 가슴에 걸친 발진, 목의 통증 등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토록 쉽게 키스로 감염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 보균자가 아닐까. 사실상 일본인을 포함해서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EB바이러스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원래 EB바이러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바이러스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머니와의 접촉이 많은 영유아기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단 영유아기에 감염될 경우 전혀 증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가벼운 감기 증상 정도로 끝나기 때문에 대부분 감염 사실을 모르는 채 어른이 된다. 또한 한번 감염이 되면 면역이 생기기 때문에 키스병이 발병하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한 살짜리 아기의 40%, 두 살은 80%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거의 100%의 사람들이 EB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EB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영유아가 줄어드는 대신 사춘기 이후에 감염돼 키스병을 일으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전문의들은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이 깨끗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침을 흘리거나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 옛날에 비해 줄어들었고, 시판 이유식이 많아지면서 어머니가 씹어서 아이를 먹이는 풍경이 사라졌다. 또 일하는 어머니가 늘어나면서 아이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었다. 생활습관의 변화로 인해 영유아가 EB바이러스에 노출될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감염이 되지 않고 성장한 아이들이 사춘기 이후에 이성과의 키스를 통해 처음으로 EB바이러스에 노출이 될 경우 키스병이 발병할 가능성은 50%가 넘는다. 그 결과 최근 들어 키스병에 걸린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키스병은 구강 인두(咽頭)의 B임파구가 EB바이러스에 감염돼 발병한다. 잠복기간은 4~6주로 그후 발열이나 목의 통증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 보통은 저절로 낫지만 면역기능이 저하된 경우 감염된 임파구가 계속 증식하면서 합병증을 일으킨다. 키스병 환자의 약 10~20%가 간이 붓고, 30%가 편도선염이 나타나고, 50%가 비장이 붓는 증상을 나타낸다.
심각한 문제는 EB바이러스로 인해 암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EB바이러스가 아프리카에서는 ‘버킷 임파종’이라는 임파구암을, 중국 남부와 대만에서는 ‘상인두암’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또한 EB바이러스가 B임파구 외에도 몸을 지키는 면역세포인 T임파구나 NK세포를 감염시켜 증식한다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그 결과 ‘만성 활동성 EB바이러스 감염증’에 걸리게 된다. 이 병에 걸리면 고열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혈구 빈식(貧食) 증후군’으로 발전하는데 치료를 받지 않으면 거의 100%의 사망률을 보인다.
이처럼 EB바이러스는 감염증에서 암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병을 일으키기 때문에 ‘천의 얼굴을 가진 바이러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구나 백신이나 특효약이 없기 때문에 일단 감염되면 빨리 증상만 완화시켜주는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 수밖에 없다.
전문의들은 “증상이 감기와 비슷해 제때 치료하지 못해 합병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감기가 잘 낫지 않을 때는 EB 바이러스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