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에 대한 부담과 과도한 연습 때문에 운동선수들에게도 ‘번 아웃 증후군’이 자주 나타난다.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육상 400m 허들 준결승에서 미국의 데무스가 골인한 후 지쳐서 누워있는 모습. | ||
‘번아웃’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태워버리다’ ‘다 타버리다’ 혹은 더 나아가 ‘다 써서 없어지다’ 등이다. 이런 의미에서 ‘번아웃 신드롬’을 ‘탈진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마치 연료가 다 타버린 것처럼 무기력해지거나 의욕을 잃게 되는 증상을 말한다.
이런 증상은 특히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흔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가령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직장인들이나 가사와 육아 그리고 직장 생활까지 동시에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는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허탈해지고 자기 자신이 쓸모 없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나도 모르는 새 나도 ‘탈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징후가 보이는 데도 모른 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극도의 정신적 긴장감이나 육체적인 피로, 우울증 등을 앓고 있거나 매사에 의욕이 없고 화를 잘 낸다면 ‘탈진 증후군’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독일 시사주간 <포쿠스>에서 소개한 ‘탈진 증후군’의 면모를 살펴 보았다.
‘탈진 증후군’이란 용어가 다소 낯설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 이 증상은 더 이상 희귀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평상시 흔하게 겪고 있는 스트레스, 우울증, 자기 상실감 등도 ‘탈진 증후군’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또 ‘탈진 증후군’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달 노무현 대통령이 넌지시 ‘대통령 임기를 못 마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데 대해 청와대 측은 “너무 힘들다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노 대통령의 상태를 ‘번아웃 상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럼 여기서 잠깐 독일에서 투자 상담가로 일하고 있는 페터 노이만 씨의 사례를 보자. 그의 업무는 하루 평균 120통의 메일을 받고 일일이 답장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수많은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시에 프리젠테이션 준비도 하는가 하면 끊임 없이 고객들과 상담도 해야 한다.
하루가 24시간인 게 모자랄 정도로 쉼 없이 일만 하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한밤중에 일어나는가 하면 목과 등이 뻐근하면서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됐다. 또한 정신적인 긴장감으로 신경이 예민해졌으며, 만성적인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직장에서의 중압감과 부담감이 더해져 매사에 화를 참지 못하던 그는 하루가 다르게 공격적이 되어 갔으며, 급기야 아내와의 말다툼 끝에 폭력까지 휘두르게 됐다.
노이만 씨는 현재 ‘탈진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
그의 경우처럼 ‘탈진 증후군’은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며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던 사람이 신체적, 정서적인 극도의 피로감으로 어느 날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 공황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 집단치료를 받고 있는 ‘번 아웃 증후군’ 환자들. | ||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다 ‘탈진 증후군’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야심이 많은 사람, 승부욕이 강한 사람, 완벽주의자, 매사에 민감하거나 예민한 사람, 사교성 없는 외톨이 등이 이런 증상에 시달릴 위험이 더 크다.
그렇다고 직업군의 뚜렷한 경계는 없다. 가령 과거에는 직장인들이나 기업인들에게 흔하게 나타났다면 요즘에는 꼭 그렇지도 않다. 가령 ‘슈퍼우먼 신드롬’에 시달리는 주부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입시 부담을 느끼는 학생들, 운동 성적에 대한 부담과 과도한 연습량으로 탈진하는 운동선수들, 대외적인 시선의 부담을 느끼는 연예인들, 혹은 정치인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탈진 증후군’의 전형적인 징후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어떨 때 내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우선 가장 큰 징후로는 ‘피로감’을 들 수 있다. 감정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무리 쉬어도 피로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 잠을 자거나 아무리 푹 쉬어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으며, 깊게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늘 신경이 예민해져 있고 매사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직장 동료나 자녀들 혹은 아내에게 불쑥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아지거나 심한 경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타인과의 단절감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다 싫어지는가 하면 ‘나’라는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로 인해 직장에서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집중력도 저하되고 매사에 냉소적인 태도가 되며 식욕, 성욕 등 모든 의욕이 상실되어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탈진 증후군’에는 신체적인 증상도 동반된다. 두통 요통 소화불량 호흡곤란 귀울림 청력저하 구역질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탈진 증후군’임을 인정하고 심각한 상황에 이르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거지?”라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마 그 정도는 아닐거야.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라며 그저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인정하지 않으면 간혹 실패했을 경우 자신을 실패자라고 단정지은 채 술을 마시거나 때로는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위해서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직장에서 성공을 위해 매진하는 것만큼 퇴근 후에도 자신만을 위한 여가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직장 동료들과 취미생활을 공유하거나 술자리를 가지거나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와 내면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휴가나 퇴근 후에는 가급적 휴대폰, 이메일 등을 멀리하고 충분히 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부탁을 들었을 때 ‘노’보다는 ‘예스’라고 말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탈진’을 막는 첫걸음일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