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의 방송관련법 등 각종 법안의 단독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기습점거한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석 주변을 지키고 있다. | ||
여야가 이른바 ‘쟁점법안’들을 놓고 극한 대치를 하던 지난해 12월 29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는 ‘웃음이 나라를 살린다’라는 주제의 이색 포럼이 열렸다. 국회유머아카데미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김재화 동아방송대 교수는 이날 “나는 늘 국회를 ‘코미디 하우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K-1 격투기를 더 잘하더라”며 최근 쟁점법안을 둘러싸고 폭력이 오간 여야의 대치상황을 비꼬기도 했다.
과연 기축년 새해에는 국회에 폭력과 폭언 대신 웃음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화합의 정치를 꿈꾸는 국민들을 위해 국회 ‘웃음포럼’을 계기로 정치인들의 유머 실력을 들춰봤다.
현대사회에서 ‘유머’란 비단 개그맨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물론 사업가들 사이에서도 유머감각은 중요한 능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화술전문가들 역시 ‘유머감각’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감성적 요소로 꼽고 있다. 그렇다면 갈등 조정을 위해 ‘대화와 타협의 마술사’가 돼야 할 정치인의 경우엔 어떨까. 그들에게도 유머감각은 필수조건은 아니나 적어도 필요조건쯤은 되지 않을까.
국회 내에 ‘유머포럼’과 ‘유머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것도 정치인들이 유머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선 유머를 배워보자는 의원들이 지난 2005년부터 매해 정기적으로 ‘웃음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4년째를 맞은 유머포럼과 유머아카데미를 통해 국회의원들은 물론 일반인 수강생들도 유머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유머를 가르치고 있는 김재화 겸임교수에게 정치인들의 유머 실력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 교수가 유머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은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 고 의원은 평소에도 ‘말재주’ 있는 정치인으로 유명한데 지난 유머포럼에서 참석했을 때에도 재치 있는 ‘몸개그’를 선보였다고 한다.
“내가 한번 신나게 놀아보겠다”고 말한 뒤 공중에 신을 벗어 날렸던 것. 김 교수는 “‘신이 날게’ 해서 ‘신나게’라는 말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개그에서 많이 쓰는 동음이의어 기법인데 고 의원이 재치 있게 활용했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고 의원에 대해 “방송경력이 많아서 그런지 유머 감각도 풍부하고 대중의 호감을 얻는 말솜씨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TV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명랑운동회>의 MC 출신인 자유선진당 변웅전 의원 역시 노련한 말솜씨를 갖고 있는 정치인이다. 변 의원은 유머포럼에 참석한 여러 학생들 앞에서 “여러분들은 국회의원이 다 나쁘다고 생각하겠지만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나처럼 훌륭한 사람도 있다”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자기 자랑’과도 같은 발언이었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기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변 의원은 이날 야권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유머포럼에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 “고스톱을 칠 때 싱글벙글 웃으면서 치는 사람 앞에는 늘 돈이 쌓여 있다. 아무리 쓰레기가 많이 쌓이는 국회에서도 샘물이 솟아오르는 유머포럼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시끄러운 국회의 요즘 상황을 빗대 말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도 말재간이 뛰어난 편이다. 이 의원은 평소 거침없는 발언을 자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의원은 지난 2006년 김무성 의원과 러닝메이트를 이루어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당시 “경제가 어려운데 (이)경재가 나서겠다”는 홍보 문구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의원은 ‘정치인’을 희화화한 농담도 자주 사용하는데 요즘 그가 자주 쓰는 ‘단골 농담’은 이것이다. ‘강물에 정치인과 박태환 선수, 김연아 선수가 빠졌다. 가장 먼저 누구를 구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김연아나 박태환 선수를 먼저 얘기하지만 정치인을 빨리 꺼내야 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국회의원’을 ‘정자’에 빗대며 ‘엄청나게 수는 많지만 사람 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농담도 자주 한다고 한다. 김재화 교수는 “이경재 의원은 지역구 행사장에 갈 때도 전화를 걸어와 참석자들에 대해 설명하며 그 분위기에 맞는 농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곤 한다. 평소 유머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국회유머포럼 대표를 맡고 있는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도 개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공 의원은 학창시절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개그클럽 ‘꿀단지’를 따라다녔을 정도. ‘꿀단지’는 1971년 임성훈 전유성 이상용 등이 만든 개그클럽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로 유명했다.
공 의원은 유머포럼에서 자신이 직접 제작한 양복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 의원은 이날 앞에 나가 갑자기 양복을 벗더니 안감을 보여주었는데 태극기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공 의원은 “국회의원들이 싸우기도 하지만 나라를 항상 생각하기도 한다. 나 같은 국회의원도 많다”면서 ‘태극기 양복’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거꾸로 들고 응원해 논란이 일었던 것과 관련해 ‘책임자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던 바 있어 ‘태극기 양복’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지난해 말 국회서 열린 이색 ‘웃음포럼’ 참가자들의 모습. | ||
민주당 이낙연 의원도 유머 하면 결코 여의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국회 농수산위 위원장인 이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이수화 농업진흥청장이 ‘장미꽃의 로열티가 얼마인지 아느냐’는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고 쩔쩔매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정작) 군밤은 못 깐다는 말이 생각난다”며 사태를 부드럽게 수습했는가 하면, 의원들이 질의 시간을 초과했을 때엔 “워낙 좋은 말씀이라 넋을 잃고 들었다”고 넉살을 피우며 시간 엄수를 에둘러 주문하기도 했다.
김재화 교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유머감각에 대해서도 ‘점수’를 매겼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유머실력을 가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김재화 교수는 “특히 DJ는 유머와 연설에는 탁월한 사람이다. 워낙 민주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해 대중 앞에서 여유 있게 말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사석에서의 말솜씨를 보면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자신에게 무슨 질문을 하면 ‘나는 잘 모르겠고 그 부분은 누구한테 물어보면 낫겠다’는 식으로 웃음을 만들면서 재치 있게 질문을 피해가는 게 인상적이다.
또 후보 시절 유세장에서 ‘저 김대중이 이 정도 생겼고 이 정도 말 잘하면 대통령 한번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반응을 유도하던 걸 봤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사석에서 멋진 농담을 재치 있게 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 또한 카리스마와 유머가 풍부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평소 유머에 대해 ‘노력’하는 편이라고 평했다. 한번은 미국 그랜드 캐년을 관람하면서 누군가가 이곳의 높이를 설명하자, ‘줄자 좀 가져와 봐라. 한번 재보자’는 농담을 날렸다고. 또 한나라당 경선 당시에도 참모들을 통해 유머감각과 화술에 대해 자문할 사람을 따로 구하려고 노력했을 만큼 유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유머를 잃은 요즘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도 유머포럼에 참석해 “내가 그동안 재선 이상 국회의원이 없었던 포항에서 6선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유머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출세한다”고 자신의 유머감각을 ‘자랑’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스스로 유머감각이 있다고 말할 정도면 그 자체로 유머감각이 있는 것”이라고 이 의원의 발언에 대해 평했다.
그런가 하면 박근혜 전 대표도 오래 전부터 수첩에 유머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애용하고 있다. 식사자리나 모임에서도 “제가 최근 유행하는 유머를 해드리겠다”며 말문을 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2007년 미국 방문 때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연설하면서 유머러스한 얘기로 숙연했던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놓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흉탄에 부모 모두를 잃었던 점을 회상하며 “인생이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털어놓은 뒤 “그래서 <평범한 가족에서 태어났더라면>이란 책을 냈는데 그마저 팔리지 않았다. 그것도 시련이었다”고 말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박 전 대표도 유머의 중요성을 잘 알고 평소에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당수 정치인들이 이처럼 유머를 배우고 또 생활화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요즘 국회의 모습을 보면 진정으로 국민들을 웃게 할 날은 아직도 먼 것만 같다. 아마도 대다수 의원들의 머릿속에 ‘국민생각’보다는 ‘당리당략’이 가득차서일 것이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여의도의 ‘봄’은 과연 언제쯤 찾아올까.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