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모두발언하는 박근혜 전 대표.사진=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하지만 변수는 역시 친박그룹이었다. 여야가 지난 1월 5일 마지막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만 해도 한나라당이 쉽사리 양보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시간을 끌며 민주당 농성단의 힘을 뺀 뒤 직권상정을 밀어붙일 태세였다. 여야가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모르고 마주 보고 달릴 때였다.
그런데 야당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있던 바로 그때, 박근혜 전 대표가 한마디 던졌다. 박 전 대표는 여야의 ‘치킨게임’을 싸잡아 공격해 양측이 극한 대결을 피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부에서는 “이번에도 ‘박력’(朴力)이 먹혀든 것”이라며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박 전 대표의 ‘한마디 정치’에 숨은 파괴력의 이면을 따라가 봤다.
이번 입법 전쟁에서 극한 대결로 치닫던 여권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은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제어장치’가 숨어 있었다. 친이세력의 강경책에 휘둘려 협상력이 떨어졌던 홍준표 원내대표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박근혜 전 대표의 ‘한마디’였다. 박 전 대표는 여야가 마지막 협상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5일 한나라당 회의에 전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연말부터 법안 처리를 둘러싼 민주당과의 협상 진행 상황을 점검하려고 하루 두세 차례씩 꼬박꼬박 열린 당 긴급 의원총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가급적 국회 주변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소속 의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때에도 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대구시당과 경북 달성군청 신년하례식 등 지역구 행사와 친박연대 지도부 오찬 등 개인 일정만 참석했던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해 7월 30일 첫 번째 최고위원·중진회의에 참석한 이후 실로 6개월 만에 당의 공식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그는 2분여 동안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현 지도부의 협상 태도를 꼬집었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국가 발전을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면서 내놓은 법안들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점도 굉장히 안타깝다”라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 옆에 앉아 있던 이상득 의원은 시종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친이세력을 대표하며 강경책을 주도했던 공성진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의 강경 일변도 비판에 대해 언짢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럴 만큼 박 전 대표의 ‘한마디’ 반향은 컸다. 여당의 주류가 밀어붙이던 입법 전쟁 전략이 비주류 수장인 박 전 대표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전례는 또 있었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한 촛불정국으로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박 전 대표는 “추가협상 후 국민의 이해를 충분히 구했어야 했다”라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한발 물러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지난해 여권에서 수도권규제완화 논란이 있었을 때도 박 전 대표는 ‘지방 우선 정책’을 주장해 수도권 개발 의지를 내비친 이명박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바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정치권에선 “이명박 정권의 핵심 정책이 대통령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의 한마디에 좌지우지된다”라는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마저 나온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친이 의원은 “박 전 대표의 한마디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처신이다. 그동안 한 번도 현안에 대해 발언하지 않다가 판이 정리되는 막판에 딱 나타나 ‘둘 다 잘못됐다’라고 말하면 그동안 싸웠던 사람들은 모두 바보가 되는 것 아니냐. 물론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져 있고 그 반대로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율은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민심을 대변해야 하는 박 전 대표로서는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정국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평소 조사 하나까지도 조심하며 공개 발언하는 박 전 대표의 성향상 이번 법안 전쟁 언급은 그 정치적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쇼이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견제구를 계속 날리고 있는 압박전술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정국에 대해서는 최대한 발언을 자제하겠다고 하면서도 중요한 국면마다 한마디 하는 것일까. 여기에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이 숨어 있다. 박 전 대표는 차기 대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주자이긴 하지만 그가 갈수록 두려워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실패와 함께 그에게 덧씌워질 ‘공동책임론’이다. 박 전 대표가 계속 당내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당 내 야당의 수장을 자처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라는 배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며 민심을 완전히 잃고 침몰할 경우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자신도 그와 함께 침몰하지 않기 위한 보험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친이세력이 그에게 ‘지금 박 전 대표가 할 일은 팔짱 끼고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계가 망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음 집권 세력으로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정권 동참’을 호소하고 있음에도 선뜻 이에 응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공동책임론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박 전 대표가 계속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세력에 대해 ‘한마디’를 하며 대립을 하고 견제를 해야만 2010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공론화될 공동책임론에 대한 자기방어와 함께 대안 제시 세력으로서의 전면 부상이라는 계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 성패는 ‘언제 화려하게 민심을 등에 업고 부상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 전 대표는 최종 대권 후보가 되기 전까지 계속 이명박 대통령의 노선에 대해 반대를 하거나 견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정권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때로는 민심과 반대로 가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촛불 정국이 그랬고 입법 전쟁 정국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럴 때마다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실책’에 대해 한마디씩 해서 민심의 대변자로 계속 자기설정을 해왔다. 그리고 국민 여론이 더 이상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에 대해 참지 못하고 민심이 폭발할 때 박 전 대표는 정치 전면에 전격 부상할 것이다. 지금 박 전 대표가 계속 여권 주류에 대해 한마디 하며 견제를 하는 것은 그 발판을 차곡차곡 만들어 정국 급부상의 파괴력을 높이는 대권 전략의 일환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박 전 대표의 급부상 전략과 공동책임론 회피 의도에 대해 차기 대권 주자 1위를 달리는 책임 있는 정치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다가 자칫 사과나무 전체가 썩어버려 그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