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번 한 청장 사퇴 파문은 풀어야 할 의혹과 함께 많은 뒷말을 남기고 있다. 충남 서산 출신인 한 청장은 자신이 국세청 내의 대구·경북(TK) 세력과 ‘반’ 한 청장 라인의 합동 공격에 ‘억울하게’ 무너졌다고 생각해 막판까지 ‘사퇴 불가’를 외치며 현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한 청장이 비록 반나절 동안이지만 청와대 뜻을 거스르고 유임 의지를 굽히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특히 한 청장이 대구에 내려가 골프를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동서인 신 아무개 씨에게 충성주를 바치며 ‘국토해양부 장관 자리를 달라’고 로비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도는 등 뒷말이 무성하다. 그가 과감하게 장관직 청탁을 부탁할 만한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란 추측까지도 흘러나오고 있다. 한상률 국세청장의 ‘저항과 퇴진’에 얽힌 몇 가지 의혹을 추적해봤다.
한상률 국세청장은 ‘그림 로비’ 의혹이 불거진 뒤 나흘 만에 사의 표명을 했다. 아직 규명되지도 않은 의혹과 관련해서 4대 권력기관장 가운데 한 명인 국세청장이 전격적으로 사의 표명을 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한 청장은 사의 표명과 관련해 하룻밤 만에 자신의 입장을 번복, 그 배경에 의혹이 증폭됐다.
애초 한 청장 측은 그림 의혹이 터진 뒤 사흘 만에 각 언론이 “한상률 청장이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다”는 보도를 잇달아 내자 공식 해명자료를 통해 “한 청장은 사의를 표명한 사실이 없으며, 사의를 표명할 계획도 없다”라고 강조하며 방어선을 펼쳤다. 하지만 한 청장 측은 해명 다음 날 오전에 “한 청장이 어제 오후(1월 15일)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다”라고 공식 확인했다. 어제는 사의표명 계획이 없다고 했다가 하룻밤 새 기존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정치권에선 한 청장이 주변의 잇단 사퇴 압력과 청와대의 ‘알아서 처신하라’는 간접적 사인을 무시하고 “사의를 표명할 계획이 없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을 두고 ‘한 청장의 반짝 항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 청장이 한때 공개적으로 ‘사의 표명 불가’를 외치자 청와대에서 불쾌해했던 것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쪽 사정라인에서 한 청장에게 ‘여론에 따르라’는 사인을 주었고 그에 따라 한 청장이 사의 표명 발표로 급선회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한 청장이 반나절 동안 현 권력에 저항의 의지를 드러낸 것은 그가 내부 갈등에 의해 부당하게 ‘전역’하게 되었다는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에게도 ‘항명’을 할 만한 ‘맷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먼저 한 청장 입장에선 이번 중도하차가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는 충남 서산 출신으로 국세청의 터줏대감인 일부 대구·경북 출신들로부터 현 정권 들어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구·경북 주류는 한 청장의 취임(2007년 11월) 초기부터 그를 심하게 흔들었다. 그런데 한 청장이 정권이 바뀌어도 유임되자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며 호시탐탐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격이 바로 올해 초 일어난 그림 상납 의혹이 아닌가 한다. 청 내부에서는 행정고시 특정기수가 치밀하게 작업을 해 한 청장을 엮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국세청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긴 하지만, 한 청장은 ‘준비된 청장’으로 일찍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05년 초 국세청의 요직이자, 행정부의 핵심으로도 불리는 국세청 조사국장에 전격 발탁됐다. 조사국장이라는 자리는 전통적으로 영남 아니면 호남이 번갈아 맡아오던 국세청의 심장이었다. 그런데 한 총장은 지난 74년 한용석 씨, 86년 이근영 씨 이후 20여 년 만의 충청 출신 조사국장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바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특정 지역 출신들의 ‘질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들 세력은 수십 년 동안 당연하게 자신들의 몫으로 생각하던 요직 경합에서 ‘물을 먹었다’는 패배감에 한 청장을 흔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번 그림 상납 의혹이라는 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청장으로서는 향후 개각 때 유임이 거의 확정적이었다가 이번 그림 상납 의혹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만으로도 억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청장 사의 표명에 대해 모두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동안 열정을 다해 일해 왔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 것도 이번 퇴진이 자신의 불찰이 아니라 주변의 견제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을 에둘러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한 청장이 반짝 항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억울하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다’라는 순진한 발상보다 더 파괴력이 있는 자신만의 히든카드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노무현 정권이 임명한 4대 권력기관장 중 한 명인 그가 정권이 바뀐 뒤에도 ‘이례적’으로 유임된 것은 물론 그의 출중한 능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그를 유임시킬 수밖에 없었던 남모를 속사정이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사정기관과 청와대 사정에 밝은 A 씨는 이에 대해 “국세청은 지난 7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전격적으로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정치권에선 국세청이 확보한 박 회장의 비밀장부와 수첩을 두고 ‘국세청발 박연차 리스트가 존재한다’라는 말이 파다하게 퍼진 바 있다. 그런데 ‘국세청이 확보한 리스트에는 노무현 정권 인사뿐만 아니라 현 정권 실세들의 이름도 있다’라는 얘기가 퍼지면서 여권이 크게 술렁인 적이 있었다. 이는 국세청 수뇌부가 박 회장 조사 과정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
이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한상률 국세청장은 지난 2007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세무수장에 올랐다. 당연히 ‘이명박 직계’가 아니다. 최근 여권에 국정원장 등 4대 권력기관의 교체설이 나돈 것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추진력을 권력기관이 강력하게 지원해주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최근 권력기관장 교체설이 나왔을 때 한 청장이 애초 유임으로 결론이 난 것도 현 정권 일부 실세들의 X파일을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큰 그를 함부로 칠 경우 나중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직안정과 한 청장의 국세청 개혁 의지를 명분으로 유임을 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청장이 국세청 내부의 ‘우발적인 사고’에 의해 낙마하게 되면서 청와대로서도 할 수 없이 교체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청장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반나절 동안 저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자신이 확보한 ‘자료’에 대한 자신감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 국세청 측은 “박 회장 측이 작성한 자료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존재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이미 폐기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한상률 청장의 두 번째 히든카드는 대구골프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지난 12월 말 입법전쟁으로 국회가 최악의 사태에 치닫고 있을 때 이상득 의원과 친분이 있는 포항지역 인사들과 골프를 함께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구나 식사 자리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동서인 신 아무개 씨까지 합석한 것으로 드러나 청와대가 한 청장에게 구두로 주의를 통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한 청장이 ‘충성주’를 마시며 ‘차기 국토해양부 장관 자리를 부탁했다’라는 의혹도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됐다. 한 청장은 이에 대해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한 청장이 권력 실세 주변 인사들에게 국토해양부 장관 자리를 부탁했다면 그 이면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 청장이 현 정권을 위해서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히’ 그런 장관 자리를 부탁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한 청장의 그 공헌을 최근 불거지고 있는 투서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최근 그림상납 의혹이 불거지자 국세청 내부에서 나온 투서가 대거 청와대 민정라인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투서에는 ‘주고받은 고가의 그림이 더 있다’는 등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인 것들도 있다고 한다. 특히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한 권력 실세가 한 청장에게 몇몇 기업의 세무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무시 못 할 청탁을 했다’는 새로운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만약 한 청장이 권력 실세들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 청장은 파괴력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나중에 자신과 관련한 비리 사건이 커질 경우 한 청장 입장에서는 ‘나도 터뜨릴 것이 있다’라는 압박용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상률 청장은 지난해 말 국세청 1급 인사를 놓고 청와대와 갈등을 겪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 청장이 이번에 경북 포항지역 인사들과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함께했던 것도 청와대와의 그간 갈등을 풀고 자신의 유임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청장으로는 이례적으로 ‘지방 출장’을 급히 내려갔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 청장과 관련한 그림 상납 의혹과 대구 골프 사건은 자칫하면 향후 재판정에서 치열한 법정 공방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한 청장도 자리에서 물러난 뒤 재판 과정에서라도 꼭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여권의 한 핵심실세를 최근 만난 한 의원은 “그 사람이 넋이 나간 듯 불안해 보였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한 청장 사건의 숨겨진 파괴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