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허세’ 대표라는 비판을 들었던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지난해 12월 초만 해도 최악의 상황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12월 4일 건강상의 이유로 돌연 경북 구미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했다. 또한 그날 예정됐던 한나라당 출입 여기자들과의 만찬 자리도 건강상 이유로 갑작스레 연기했다. 당 일각에서는 “박 대표가 계속되는 청와대의 무시에 열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원외라는 한계 때문에 청와대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니 당내에서도 ‘영’이 서지 않는 악순환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박희태 대표 특보단은 한 보고서를 통해 박 대표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행사를 바쁘게 쫓아다니기만 하고, 청와대와 소통은 안 되고 당내에선 실권이 없는 관리형 대표’라고 분석하며 ‘장악력 강화’를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박 대표의 위상은 불과 한 달 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박 대표가 최근 용산참사 해결책을 두고 청와대의 확실한 신임을 받았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홍준표 원내대표와의 해결책 대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홍 대표는 용산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즉각 관련자 책임론을 거론하며 김석기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사건 발생 초기의 들끓는 민심을 감안하면 홍 대표의 대처는 정치인다운 민첩함이 있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홍 대표와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그는 용산참사 해결책을 두고 “사건만 났다 하면 지휘자 목을 떼어놓고 조사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게 옳은 것인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또한 “무조건 사고 나면 ‘너 책임지라’고 한다면 공권력이 과연 효율적으로 집행되겠느냐”라고도 말했다. 홍 대표의 책임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또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홍 대표를 용산참사 대책회의에서 ‘왕따’시키는 전술도 병행하며 ‘돈키호테’ 원내대표를 철저하게 제압했다. 홍 대표는 용산참사 해결책을 두고 강경 발언을 쏟아내다가 청와대의 ‘함구령’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왔을 만큼 이번 사태 과정에서 여권 핵심부에 확실하게 ‘찍힌’ 반면, 박 대표는 이상득 의원과 친분이 깊은 김석기 경찰청장 카드를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가 인정됐다.
박 대표의 위상 강화는 최근 개각 과정에서 보여준 청와대의 여당 경시 풍조를 무마할 ‘위무용’ 카드와도 연결된다. 사실 여당의 일부 중진들을 중심으로 이번 청와대의 ‘일방적 개각’을 성토하는 움직임이 매우 거셌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모임에 참석했던 의원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은 혼자 따로 가는 분이다”, “한나라당에 일정한 지분이 없이 들어왔다가 대권까지 차지한 사람이 여당에 대해 너무하는 것 아니냐”라는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장사꾼의 전형을 보여줬다”라는 험한 말들도 나왔다.
청와대는 뒤늦게 여당의 반 이명박 기류를 감지하고 그 해결책 찾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여당 내부에서는 이번 행정안전부 장관 추천을 박 대표가 직접 발표하는 모양새를 취한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박 대표는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직접 접촉하며 자신의 특보를 지낸 이달곤 의원을 직접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김석기 경찰청장의 사퇴를 주장하는 여당의 입장을 세워주기 위해 이달곤 카드를 전격 성사시켰다는 후문이다.
또한 박 대표 측의 한 관계자는 “이번 당·청 간 인사 협력을 통해 청와대가 향후 있게 될 개각에서도 계속 여당 의원들을 입각시킬 것을 약속했다. 오는 6월경 있을 개각에 사회분야인 법무부, 지식경제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직에 김무성 허태열 안상수 안경률 의원 등이 입각 1순위로 거론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박 대표가 이번 이달곤 의원의 입각을 통해 여당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청와대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장관직 하나 받고 그냥 무장해제하는 것이 여당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박 대표도 경망스럽게 자신의 위상에만 골몰하지 말고 당·청의 대등한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박희태 대표의 몸값은 여권의 권력구도상 유용한 ‘인물’로 자리매김돼 앞으로 더 상승할 여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집권 여당의 권력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득 의원은 최근 친이재오그룹의 조기전당대회 추진에 대해 “또다시 당내 갈등을 촉발시킬 것이다”라며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일각에서는 조기전당대회가 실시되면 이상득 의원이 친박그룹과 연대해 이재오-정두언 연합군에 대항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 대표는 지역구만 문제가 될 뿐 오는 4월 재·보궐 선거에 나가는 것이 확실시된다. 친이재오그룹에서는 그가 당 대표직을 떼고 나간 뒤 조기전당대회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 대표 측은 이에 대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앞서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원외 대표가 재·보궐 선거에 나간 전례가 두 번 있다. 조순 총재가 지난 98년에, 이회창 총재가 99년에 송파에 출마한 적이 있었다. 박 대표는 원외 대표로 직함을 달고 세 번째 출마하게 된다. 일부에서 조기전당대회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이제 힘이 없다. 경제가 위기에 빠져있는데 조기전당대회로 당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을 비롯한 당 주류는 박희태 대표 체제를 내년 지방선거까지 그대로 유지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최근 들어 박 대표에게 힘을 실어줘 친이재오그룹의 조기전당대회 공세를 막고 재·보궐에서도 승리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허세’ 대표의 낙인이 찍혀 마음고생이 많았던 박희태 대표. 하지만 당내 안정이 최우선인 이상득 의원의 ‘보호’ 아래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귀국이 그에게는 대표직 유지의 또 다른 변수가 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