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청동상은 지난 1992년 북한의 개성 왕건릉(현릉)에서 출토된 왕건 동상과 많은 유사점을 가져 ‘왕건상’으로 추정됐지만, 일각에서는 ‘불상’이라는 주장도 나와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가운데 청동상이 왕건임을 논증한 첫 논문이 발표됨에 따라, 청동상의 가치와 천안지역의 역사·문화적 중요성이 재조명될 전망이다.
이 논문은 8일 오후 1시 30분 천안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왕건, 신도시 천안을 건설하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에서 이 청동상을 일반에 최초 공개했다.
지난 2016년 6월 천안 목천읍의 한 전원주택 텃밭에서 출토된 청동 얼굴상. 8일 천안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왕건, 신도시 천안을 건설하다’ 학술대회에서 이 얼굴상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청동상은 지난해 6월 천안 목천읍의 한 전원주택 텃밭에서 석탑의 일부, 기와 등과 함께 출토됐다.
출토 당시, 청동상은 관(冠)을 쓴 머리부분(頭部)만 남아 있었으며, 크기는 높이 9.11cm, 두부 8.41cm, 측면 5.82cm, 폭 6.82cm이다.
정은우 동아대학교 교수는 ‘천안출토 청동왕건상의 특징과 상징성’이라는 논문에서 “이 청동상은 왕건이 천안에서 활동했던 내력, 천안 소재의 왕건 관련 유적 및 지명 등과 함께 왕건의 초상조각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개성 왕건상과의 흡사성, 고려 초기 제작 가능성 등을 주안점으로, 천안 청동상의 주인공이 왕건인 이유를 3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천안 청동상은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천안 출토 청동상은 볼에 살이 있어 통통한 느낌이 강하며 턱으로 올수록 갸름해진다.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은 뺨에 살이 있는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고려 후기 불상과 차별화된 특징이다.
또한 청동상 전체가 통주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고려초기 불상에 나타나는 조각 기법이다. 개성의 왕건상도 태조 왕건 사후 10~20년 사이인 광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천안 청동상은 개성 왕건상의 모습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두 동상 모두 관 중앙에 있는 금박산과 서잠대, 도금한 흔적 등이 있다. 얼굴은 모두 젊은 인물상이다. 아울러, 두 동상 모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통천관은 황제가 강사포(絳紗袍,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을 때 입던 예복)를 입을 때 쓰던 관이다.
셋째는 천안 청동상의 통천관 중앙 오각형의 산(금박산)에 새겨진 ‘王’자다. 이는 처음 나온 사례로, 당시에는 왕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태조 사당 영정의 존재를 비롯한 왕건과 천안의 친연성 등이다.
‘왕건, 신도시 천안을 건설하다’ 학술대회 포스터.
천안시가 주최하고 (재)가경고고학연구소 주관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관중인 청동상이 일반에 최초 공개돼 그 의미를 더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정 교수의 논문 외에도 ▲대전대 김갑동 교수의 ‘고려 태조대 목천의 지방세력과 천안’ ▲경북대 김명진 교수의 ‘고려시대 천안지역의 왕실불교’ ▲(재)가경고고학연구소 이판섭 연구원의 ‘고려시대 천안의 교통로 양상과 입지’ 등 주제발표가 이어질 예정이다.
또한, 공주대 윤용혁 교수를 좌장으로, 조한필 전 중앙일보 기자, 한얼문화유산연구원 조원창 연구원, 단국대 엄기표 교수, 수원대 양정석 교수가 패널로 참석해 ‘천안 청동상과 천안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에 대한 깊이있는 토론을 진행한다.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고려와의 연관성을 눈에 보이는 유적·유물 없이 고문헌의 기록, 지명의 유래, 설화 등에서만 의존하던 천안이 고려 건국에 있어 큰 의미가 있는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른 학계에 새로운 시사점, 천안의 역사적 위상과 문화적 가치도 제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천안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설치한 신도시였다”며 “이번 학술대회는 왕건상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을 중심으로 천안이 고려시대 요충지였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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