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희·노태악 부실 선거 책임론 속 자진 사퇴…대법관 겸직 관례와 ‘퇴임 후 유임’ 사례 재조명
[일요신문] 초대 사광욱부터 최근 사퇴한 22대 노태악을 거쳐 현재의 위철환 직무대행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 위원장(직무대행 포함) 자리에 오른 인물은 모두 22명이다. 눈에 띄는 점은 2대 주재황 전 위원장이 4대까지 연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대법관으로서 중앙선관위원장을 겸직했다. 직무대행은 13대와 14대 사이의 정홍원과 현재 위철환, 2명이다. 정홍원은 검사 출신, 위철환은 변호사 출신이다. 정홍원이 직무대행을 맡은 기간은 한 달여에 불과했고, 위철환 역시 차기 중앙선관위원장이 임명될 때까지 짧은 기간 직무대행을 맡을 전망이다.
노태악 전 위원장은 2026년 3월 대법관에서 퇴임했지만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유지한 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사진=박은숙 기자중앙선관위원장은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와 함께 5부 요인으로 총리급 인사다. 5부 요인 가운데 의전 서열은 가장 낮다. 9대 윤관, 11대 최종영, 12대 이용훈, 16대 양승태 이상 4명은 중앙선관위원장을 거쳐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특히 윤관 전 대법원장은 중앙선관위원장 재임 중 대법원장으로 지명됐다. 8대 이회창, 10대 김석수, 직무대행 정홍원 등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회창은 국무총리 외에도 감사원장, 국회의원, 당 대표(총재), 대통령 후보 등을 역임했다. 16대 양승태는 역대 중앙선관위원장 가운데 유일하게 구속된 이력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114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3인,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9명의 위원 가운데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아왔다. 임기는 6년인데 이를 모두 채우는 사례는 거의 없다. 대법관에서 퇴임하면 임기가 남아 있더라도 중앙선관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최근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노태악 전 위원장은 2026년 3월 3일 대법관에서 퇴임했지만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유지한 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부실 선거 논란이 불거지면서 6월 5일 사퇴했다.
지난 3월 대법관 퇴임이 예정돼 있던 노태악 전 위원장의 후임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은 천대엽 대법관을 내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곧 국회에 인사청문요청서를 보내겠다”고 밝혔지만, 제출하지 않았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사법행정의 중심에 있었던 인사가 선거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상징해야 할 중앙선관위를 이끄는 것에 국민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히는 등 천대엽 내정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대법원은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후임 위원장이 취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6월 지방선거가 임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 노태악 전 위원장의 유임을 결정했다.
김능환 전 위원장은 대법관이 아닌 중앙선관위원장 신분으로 제18대 대통령선거를 무난히 치른 뒤 2013년 3월 사의를 밝혔다. 사진=일요신문DB대법관 임기가 끝난 뒤에도 중앙선관위원장 자리를 유지한 사례는 노태악 전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4명이다. 최초 사례는 14대 손지열 위원장이다. 그는 2006년 7월 대법관에서 퇴임했지만 같은 해 10월까지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유지했다. 당시 국회에 중앙선관위원장 상근화를 위한 선관위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어서 퇴임을 유보했으나 약 3개월 뒤 사의를 밝혔다. 당시 손지열 위원장의 사의 표명을 두고 정치권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중앙선관위원장 상근화를 위한 선관위법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7대 김능환 전 위원장은 2012년 7월 10일 대법관에서 퇴임했고, 그 무렵 중앙선관위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이 사직서를 반려하면서 유임됐다. 김능환 전 위원장은 대법관이 아닌 중앙선관위원장 신분으로 제18대 대통령선거를 치른 뒤 2013년 3월 사의를 밝혔다. 당시에는 대선을 차질 없이 관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노태악 전 위원장에게도 이를 바랐지만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불명예 퇴진으로 끝나버렸다.
권순일 전 위원장은 2020년 9월 대법관에서 퇴임했지만 “선관위 간부급 인사를 마친 뒤 퇴임하겠다”며 같은 해 11월까지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유지했다. 사진=박은숙 기자20대 권순일 전 위원장은 2020년 9월 대법관에서 퇴임했지만 같은 해 11월까지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유지했다. 대법관 퇴임 당시 권순일 전 위원장이 관례를 깨고 “선관위 간부급 인사를 마친 뒤 퇴임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권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당시 중앙일보는 칼럼을 통해 “선관위 역사에서 권순일 위원장처럼 선거 부실 관리와 편파 논란에 직면한 사람은 없었다. 권순일이 입법부 요직 등을 찾아다니며 ‘대법관 임기를 마친 뒤에도 선관위원장을 계속 맡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니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다. 권순일은 우물쭈물하지 말고 선관위원장직에서 사퇴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권순일 전 위원장은 2020년 9월 22일 사의를 표명했다. 다만 하루 전인 21일 신임 사무총장(장관급)에 김세환, 신임 사무차장(차관급)에 박찬진을 임명하는 간부급 인사를 단행했다.
노정희 전 위원장은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불거진 ‘소쿠리 투표’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 사진=박정훈 기자21대 노정희는 역대 최초 여성 중앙선관위원장이다. 그러나 앞선 사례들과 달리 대법관 임기가 2024년 8월 1일까지로 남아 있었고,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임박한 상황이었음에도 2022년 5월 16일 중앙선관위원장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사퇴 배경에는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있었다. 2022년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당시 중앙선관위는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과정에서 기표한 투표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않고 선관위 직원에게 전달해 대신 투표함에 넣도록 하는 방식을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확진자와 격리자의 투표용지를 소쿠리와 비닐봉지에 담아 운반하는 일이 벌어져 큰 비판을 받았다.
거센 사퇴 압박에도 노정희 전 위원장은 중앙선관위 직원들에게 “지방선거를 흔들림 없이 준비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위원장으로서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계속된 사퇴 압박에 결국 자진 사퇴했다.
중앙선관위원장은 비상근직으로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다. 실무는 주로 중앙선관위 상임위원과 사무총장이 맡는다. 과거에는 중앙선관위원장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20대 권순일, 21대 노정희, 22대 노태악 등 중앙선관위원장이 연이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공교롭게도 부정선거 음모론이 확산된 시기와 맞물린다. 20대 권순일 시절 치러진 제21대 국회의원선거, 21대 노정희 시절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22대 노태악 시절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둘러싸고 부정선거 음모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선관위원장 상근화 논의 재가열…선관위와 법원 구조적 고리 끊어질까
대법관의 중앙선관위 위원장직 겸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앙선관위가 처음 설립된 것은 제2공화국의 제3차 개정헌법을 통해서다. 그 전까지는 행정기관에 설치된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관장했는데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독립적인 선거관리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제2공화국 제3차 개정헌법 제75조의2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법관 중에서 호선한 3인과 정당에서 추천한 6인의 위원으로 조직하고, 위원장은 대법관인 위원 중에서 호선한다”고 규정했다. 3·15 부정선거의 영향으로 입법부나 행정부보다 사법부 인사가 위원장을 맡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었다.
공정성과 독립성이 특히 요구되는 대법관이나 법관이 사법부 외 국가기관의 위원 또는 위원장을 겸직한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폐지됐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제3공화국 제5차 개정헌법을 통해 다시 헌법기관으로 명문화됐다. 이때부터 관련 규정은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한다’로 개정됐지만 대법관이 계속 위원장을 맡으면서 관례로 굳어졌다. 각 시·도 선관위 위원에도 해당 지역 관할 지방법원장이 추천한 법관 2명이 포함되는데, 역시 관례적으로 법관인 위원이 위원장을 맡는다.
문제는 대법관이나 법관이 사법부 외 국가기관의 위원 또는 위원장을 겸직한다는 점이다. 선관위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선거법 위반 행위를 적발해 검찰에 고발하는 것이다. 검찰이 해당 사건을 기소하면 정식 재판이 열리고, 고발 주체가 속한 법원이 사건을 심리·판단한다. 이로 인해 로마법에서 유래한 라틴어 법언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Nemo iudex in causa sua)”에 배치되는 구조라는 지적이 거듭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선거소송에서 사법부의 독립성이 침해될 경우 공직선거 관리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며, 선관위 구성 과정에서 법관의 위원 및 위원장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 불거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최종 판단 역시 법원이 맡는다. 중앙선관위는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한 선거소청을 접수한 상태로 60일 이내에 결과를 내놔야 한다. 소청인이나 당선인이 선거소청 결과에 불복할 경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시·도지사 선거의 경우 대법원이 소송을 관할하며, 소 제기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판결을 선고해야 한다.
또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사상 초유의 ‘부실 선거’ 사건을 수사할 검·경 합동수사본부(합수본)가 구성됐다. 합수본은 선관위 관계자들의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 성립 여부 등을 들여다볼 전망이다. 향후 기소가 이뤄질 경우 유·무죄 판단은 법원의 재판을 통해 가려지게 된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중앙선관위원장을 대법관이 겸임하는 비상임 명예직이 아닌 전임 상임 책임직으로 전환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사진=박은숙 기자지난 8일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선관위와 법적 분쟁이 발생하거나 국민이 선관위 결정에 불복하면 법원이 최종 판단을 해야 한다”며 “선관위와 법원이 구조적으로 한 몸처럼 밀착돼 있으면 공정한 재판에 대한 합리적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선관위는 더욱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선관위와 법원 간 구조적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선관위원장을 대법관이 겸임하는 비상임 명예직이 아닌 전임 상임 책임직으로 전환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2006년 17대 국회에서는 중앙선관위원장 상근화 방안으로 논의가 진지하게 이뤄졌지만 끝내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22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최근 불거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국회에서 관련 논의가 다시 본격화될 전망이다. 중앙선관위에 대한 제도 개편이 이뤄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