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주변에선 전·현 정권 실세들의 실명이 거론되고 있고,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의 자녀 등 가족들에게도 돈을 건넨 정황이 포착되고 있는 실정이다. 박 회장이 구속된 이후 여의도 정가와 사정당국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돌았던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이 리스트에는 참여정부 인사들뿐만 아니라 김영삼·김대중 정부와 현 정부 실세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여의도 정치권을 초긴장 모드로 몰아넣고 있다.
단순한 소문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폭발력을 가진 핵뇌관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와 그 후폭풍을 진단해 봤다.
지난해 12월 12일 탈세 및 뇌물 공여 혐의로 박연차 회장을 구속한 검찰은 이후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박연차 리스트’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박 회장이 참여정부 인사뿐만 아니라 신·구 정권을 망라하고 정·관계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수 정·관계 인사들이 ‘리스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실제로 박 회장은 2002년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7억 원을 제공한 바 있고, 2006년에도 열린우리당 386 정치인 등 의원 20명에게 차명으로 총 9800만 원의 후원금을 전달했다가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박 회장은 또 지난 2000년 한나라당 재정위원을 지냈는가 하면 2002년 대선 과정에서는 한나라당에 10억 원의 특별 당비를 내는 등 집권 여당과도 친분관계를 유지해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이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에게 ‘보험’을 들었다는 소문이 설득력 있게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과 박 회장이 ‘리스트’ 실체를 전면 부인하면서 정·관계 로비 수사도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박 회장은 그동안 ‘리스트’ 실체에 대해 “그런 게 있었으면 국세청 조사나 검찰 압수수색에서 전부 다 나왔을 것”이라고 부인했고, 검찰도 박 회장으로부터 ‘리스트’와 관련한 어떠한 진술도 확보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최근 검찰 주변에서 ‘박 회장이 신·구 정권 실세 4명에게 수억 원의 돈을 전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는데도 검찰은 공식적으로 “박 회장이 (관련된 내용을) 진술한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박 회장에게서 돈을 수수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포함해 범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는 C 전 의원, 참여정부 실세로 통했던 A 의원,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기업인 B 씨 등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2월 19일 기자와 만난 대검의 한 관계자는 일부 언론에서 영문 이니셜로 보도되고 있는 신·구 정권 실세들의 실명을 비보도를 전제로 귀띔해 줬다. 이 관계자는 “‘박연차 리스트’는 검찰 내에서도 극비 사항”이라며 “신·구 정권 실세 4명의 경우 박 회장의 진술이 아닌 검찰의 광범위한 계좌추적 등을 통해 돈 거래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2월 19일 일부 언론에서 실명이 공개된 박관용 전 의장은 같은 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계를 은퇴한 뒤 2004년 말 이사장으로 있던 연구원에 박 회장이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며 “현역 정치인으로 있는 동안에는 박 회장으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박 전 의장은 또 “박 회장으로부터 정확히 얼마를 받았는지는 기억하지 못 하겠다”며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이고 난 노 전 대통령을 탄핵한 사람이라 현역 정치인 시절에는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3선 의원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말에 장관을 지낸 바 있는 C 전 의원은 2월 20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야당 시절 부산을 자주 내려갔는데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등에서 박 회장을 만난 기억은 나지만 박 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고 돈을 주고받은 사실은 더 더욱 없다”고 주장했다. C 전 의원은 또 “2004년 16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만큼 정치자금을 건네받을 입장도 아니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2월 19일 저녁 기자와 통화한 A 의원 측은 “검찰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본다”며 “A 의원은 박 회장에게서 공식적인 후원금 500만 원 외에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로 알려진 B 씨는 기자가 몇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박 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진 B 씨는 공직자 신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자금법 등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회장과 B 씨의 돈 거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경선기간이나 대선 과정에서 돈이 오갔을 경우 적잖은 정치적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B 씨가 이 대통령의 선거캠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점에서 박 회장 돈이 선거자금으로 유입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박관용 전 의장이 박 회장으로부터 도움 받은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조만간 박 전 의장을 불러 금품 수수 경위를 확인하는 등 ‘박연차 리스트’ 수사에 박차를 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박 회장 가족 명의의 금융계좌 30여 개를 추적하는 등 정·관계 로비 수사를 확대하고 있어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편법 증여 의혹 등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는 등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박 회장이 심경변화를 일으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한 신문이 2월 20일 “박 회장이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자녀 등 가족들에게도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러한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검찰은 같은 날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자녀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바 없다”며 언론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친노그룹 핵심 인사도 2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일부 보수언론이 검찰 수사를 앞질러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전 방위적인 수사를 펼치고 있는 검찰은 유독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신중 모드를 고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리스트’와 관련된 검찰 내부 정보가 밖으로 알려진 데다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일부 인사는 돈 수수 사실을 시인하고 있어 어떤 형태가 됐든 ‘리스트’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신·구 정권을 망라한 ‘박연차 리스트’는 언제 어떤 식으로 베일을 벗게 될까, 또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여의도 정가에 폭풍전야 같은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홍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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