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득 의원 | ||
그런데 여권이 내심 기대했던 이 두 가지의 ‘정치적 카드’가 상대방의 대대적 반격 태세와 맞물리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다. 여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박근혜, 노무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자칫 우리가 그 덫 속에 걸려들게 생겼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여권이 ‘박연차 리스트’의 후폭풍을 너무 안이하게 판단, 수사 초반에 무리하게 정치권을 밀어붙여 결국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 정국에 얽힌 여권의 딜레마를 들여다봤다.
연차 리스트’ 사건은 정치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사건이다. 특히 이것은 한나라당의 대권 구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여당의 부산·경남 지역 친박 계열 의원 간의 연루설이 계속 터져 나오자 일각에서는 “여권 주류가 친박계를 서서히 고사시키기 위해 만든 기획 수사”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박근혜라는 강력한 대권주자를 둘러싸고 있는 측근들의 힘을 빼지 않는 이상, 차기 대권 구도는 여권 주류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는 구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연차 리스트는 여권 핵심부에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셈법이 깔려 있다.
특히 이번에 연루된 친박 계열 의원들이 용케 빠져나간다고 해도 향후 친이-친박의 대선주자 대결에서 박연차 리스트가 그들을 옭아맬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사건이 한나라당의 대권구도와 밀접하게 연동되는 부분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해 말 ‘박연차 리스트’가 국세청에 의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풀 버전’이 보고된 그 이후부터 청와대 정무팀이 본격적으로 이 사건의 파장에 대해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욱이 청와대 정무팀이 리스트 정국의 파장에 대한 여당의 반응을 떠보는 등 준비를 철저하게 해온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은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갖고 기획수사되고 있는 게 아니다.
법질서를 확립하고 정치윤리의 토대를 만드는 계기로 봐야지 그렇게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반박했다.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리스트 정국 뒤에 감춰진 여권의 ‘대권주자 박근혜 죽이기’ 기획이 상대방의 본격적인 반격에 의해 깨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계속 나오고 있다.
먼저 여권 주류의 친박그룹 고사작전은 박근혜 전 대표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또한 ‘박연차 리스트’라는 전장에서 마주친 ‘친이-친박’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경주 재선거’라는 국지전을 통해 친박그룹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결국 친박 측의 판정승으로 끝날 것이라는 성급한 해석도 나온다.
이 국지전의 중심에는 당연히 박근혜 전 대표가 있다. 그는 이상득 의원이 자신의 안보특보를 역임했던 정수성 무소속 후보의 경주 재선거 출마를 저지했다는 논란과 관련, “우리 정치의 수치”라며 ‘영일대군’ 이 의원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이날의 한마디로 양수겸장을 노렸다고 보고 있다.
경주 재선거에서 정수성 후보를 직접적으로 지원하지 못했던 박 전 대표로서는 이날의 발언으로 그에게 부동층 지지의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 됐다. 그가 만약 경주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친박 계열 의원이 한 명 더 늘어나는 동시에, 경주·안동 등지의 경북 북부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는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날 박 전 대표의 ‘작심 발언’은 친박그룹으로 조여 오는 박연차 리스트의 칼끝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방패 역할을 해낸 것과 동시에 여권 주류를 향해 ‘박연차 리스트를 가지고 더 쳐들어오면 우리도 터뜨릴 것이 있다’라는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실 박 전 대표가 “우리 정치의 수치” 발언을 한 배경을 두고 당내에서는 “일개 지역구 재선거의 후보 공방을 두고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강하게 이상득 의원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친이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자신의 ‘한마디’ 위력을 아는 이상 그것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박 전 대표 발언에 이상득 의원의 ‘공작정치’ 행태를 비난한 의미도 있지만, 그 시기가 김무성 의원 등에 대한 검찰의 압박 수위가 높아질 때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핵심 측근들을 힘없이 내줄 경우 신뢰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해 작심하고 발언을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 전 대표가 “우리 정치의 수치”라는 말을 한 시기는 검찰의 친박 의원들에 대한 압박이 한창 시작될 무렵이었다. 특히 친박그룹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의 실명이 나오면서 검찰의 압박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였다.
▲ 박근혜 전 대표 | ||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박 전 대표는 지난 1일 본회의장 입장 전 한마디를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상득 의원의 반응이 궁금증을 낳았다.
그는 박 전 대표의 ‘수치’라는 공격에 “그런 일 가지고 오해할 필요가 없다”라며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 한 친이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수치’ 발언에 대해 “아무리 박 전 대표가 대권주자이긴 하지만 6선 의원으로서 당의 원로인 정치인에게 ‘요즘 세상에 뒤에서 정치공작이나 사주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은 도를 넘어선 발언”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의원이 대응을 자제한 것은 “경주 재선거를 앞두고 계속 맞서서 이야기를 하면 정수성 후보만 키워주는 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원의 ‘침묵’은 또 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박 전 대표 측이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하여 모종의 정보를 확보해놓고 반격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가 이번에 이상득 의원의 정수성 후보 사퇴 종용 논란이 터지자 그것을 구실로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에 이 의원이 정면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캠프 때 활약했던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친박 세력은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친이 세력과 갈라서서 싸웠지만 그 뒤 대선 과정에서는 같이 선거운동을 했다. 비록 캠프의 핵심에서는 비켜나 있었지만 여러 번 선거를 같이했던 ‘정치적 동지’이기 때문에 당의 자금 흐름이나 민감한 문제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친박 세력이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저쪽은 우리보다 더 많이 받았을 수도 있는데 왜 우리만 건드리느냐’라는 반응을 보이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한마디를 등에 업은 친박 세력의 ‘벼랑 끝’ 전술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의 발언 뒤 검찰은 그동안 논란이 됐던 김무성 의원 등의 후원금 내역 조사와 관련해 무혐의 판정을 내리고 사실상 그들에게 확실한 ‘면죄부’를 준 것이다.
홍만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은 지난 2일 “전·현직 의원들의 후원금 내역 확인 결과 김무성 권경석 한나라당 의원은 클리어(혐의 없음)됐다. 선관위에서 후원금 자료를 확보한 10여 명 이상의 정치인 중 상당수도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이례적으로 “수사를 끝낸 후 발표해야 하지만 의혹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해당자의 혐의가 없으면 없다고 하겠다”라고 ‘확실하게’ 의혹 의원들에 대해 면죄부를 줘 그 배경을 놓고도 말들이 많았다.
“검찰이 여당의 압력을 받고 ‘친절하게’ 혐의점을 클리어해 줘 그동안 시달려온 친박 의원들을 배려했다”라는 말들도 나왔다. 또한 여의도 일각에서는 “일단 여당 현역 의원들에 대한 검찰의 소환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 같다.
특히 친박 의원들에 대한 검찰발 압박은 김무성 의원 등이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봐야 한다”라는 성급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검찰이 박진 의원 등 여당 중진을 소환할 때만 해도 박연차 리스트 후폭풍의 끝이 어디일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파괴력이 있었지만 김무성 의원 등의 무혐의 판정이 나오면서 일단 여권의 정치권 사정은 확전과 종전의 분수령에 처해 있다고 봐야 한다.
정치권에선 여전히 두 가지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용두사미 성격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상은 “박연차 리스트에 친박 세력 외에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 동기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이 뒤섞여 있는 이상 아군만 솎아내고 판을 정리할 묘수가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그 하나다.
현재의 청와대 정무라인이 대결적 구도보다 화합형을 선호하는 소프트 라인이라는 점에서 ‘친박 세력 죽이기’와 같은 전투형 모드로 계속 끌고 가는 것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의 ‘수치’라는 한마디에 여권 핵심부가 적잖게 당혹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번 사건이 용두사미로 흐를 입구에 서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의도 정치에 상당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아군의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연루된 인사들을 모조리 치려 할 경우 검찰의 칼끝이 어디로까지 향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바로미터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 동기인 천신일 회장의 처리 여부가 될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천신일 회장이라는 호미로 이번 사태를 막으려고 하다가 나중에 더 큰 가래가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