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대선 TV 합동 토론회에서 만난 이명박 후보(왼쪽)와 정동영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 ||
하지만 법원의 영장청구 기각으로 여권에 대한 부실 수사 논란이 가중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구 정권 인사들을 타깃으로 의도적으로 강도 높은 수사를 펼쳐온 게 아니냐는 의혹만 키우고 있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6월 5일 전격 사퇴했지만 검찰 수사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가라앉지 않고 검찰 책임론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당은 “더 이상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없다”며 특검을 통해 ‘박연차 게이트’의 실체 및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하고, 나아가 2007년 대선자금까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며 대여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거센 후폭풍과 천 회장의 영장 기각으로 인한 부실 수사 논란이 검찰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특검 정국으로 확전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과연 2007년 대선의 주역이었던 이명박 대통령(MB)과 정동영 의원이 ‘태풍의 눈’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특검’ 태풍이 여의도 정가에 다가오는 걸까.
‘박연차 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태로 총체적 난맥상에 부딪혔다.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해 작심하고 뽑아든 ‘천신일 구속’ 카드가 불발되면서 부실 수사 논란과 맞물려 문책론이 봇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임채진 전 총장이 전격 사퇴했지만 수사팀 문책론과 검찰 개혁론이 거세지면서 종착역을 향하던 박연차 사건은 급제동이 걸리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민주당 등 야권은 검찰 수사를 신뢰할 수 없다며 특검 카드로 전 방위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과 구 정권에 대해선 무차별적 저인망식 수사 행태를 보인 반면 현 정권 인사들에 대해선 ‘봐주기’ 내지는 ‘생색내기’ 수사를 진행한 정황이 드러난 만큼 특검으로 실체적 진실을 가려야 한다는 논리다.
박연차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지난 4월에 이미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청탁사건 특검법’을 국회에 제출한 민주당은 6월 5일 이명박 대통령과 천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천 회장의 개인비리 의혹을 넘어 이 대통령까지 직접 겨냥하는 그야말로 대여 전면전을 선포한 셈이다.
‘천신일 3대 의혹 특위’ 명의로 대검 중수부에 접수한 고발장에서 민주당은 천 회장의 10억 수수설, 30억 당비 대납 의혹, 330억대 자금조성 의혹은 서로 관련이 있는 의혹들이라고 규정했다. 고발장에 따르면 천 회장은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대선 당시 10억 원을 받았고, 천 회장은 MB의 특별당비 30억 원 조달에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줬다는 것. 천 회장은 MB 대선캠프의 ‘사실상 후원회장’으로 불릴 정도로 대선자금 조달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2007년 주식매각으로 조성된 330억 원대 자금은 대선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중 일부가 특별당비 30억 원과 관련이 있다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민주당은 천 회장의 2007년 330억 원대 자금 조성 경위와 사용처, 30억 특별당비 의혹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한 만큼 검찰 수사 추이를 지켜본 뒤 여의치 않을 경우 특검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정치권 관계자들 사이에선 민주당이 이 대통령과 천 회장을 검찰에 고발한 것은 특검 수순을 밟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검찰 고발 없이 곧바로 특검을 주장할 경우 ‘정치 공세’라는 역풍에 직면할 수 있는 만큼 ‘명분 쌓기’ 차원에서 검찰 고발을 결행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따라서 천 회장 수사 과정에서 대선자금 의혹 사건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킨 검찰이 민주당의 고발 건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따라 대선자금 의혹 사건이 특검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민주당이 천 회장과 함께 이 대통령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만큼 2007년 대선 경선 및 대선자금 문제가 정치권을 뒤흔드는 핵뇌관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물론 특검법안 가결 정족수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과반이 훨씬 넘는 절대 다수 의석(170석)을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특검법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와 천 회장에 대한 영장 기각 이후 부실 수사 논란과 함께 검찰 불신이 증폭되면서 특검 도입이 절실하다는 야권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어 실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6월 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특검 도입을 찬성하는 의견은 57.5%로 특검 반대(34.3%) 의견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의 부실 수사 논란이 증폭되면서 ‘박연차 게이트’ 사건은 물론 ‘노 전 대통령 서거 사태’에 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대선자금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총체적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야기한 검찰 수사를 비판하고 이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이 교수사회와 시민사회단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특검 정국이 도래할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6월 3일 서울대·중앙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기폭제로 대여 반발 움직임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특히 교수사회와 시민사회단체의 반발 배경에는 ‘민주주의 위기감’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는 점에서 릴레이 시국선언이 자칫 대규모 민중집회로 이어져 ‘정권 퇴진’ 운동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민주당은 확산되고 있는 대여 반발 움직임을 등에 업고 반드시 특검을 관철시킨다는 전략이다. 특히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대선자금 의혹 사건은 장기전으로 몰고 가 대여 강경투쟁 및 정국 주도권 장악에 적극 활용한다는 내부 방침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자금 사건은 ‘살아 있는 권력’의 심장부를 직접 겨냥해야 한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든 특검이든 분명 현실적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이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흔들 수 있는 호재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전략으로 풀이된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주류 측이 2007년 대선자금 문제를 정치쟁점화시키고 있는 배경에는 또 다른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대선자금 뇌관이 폭발할 경우 이 대통령뿐만 아니라 지난 대선 때 민주당 후보였던 무소속 정동영 의원에게까지 그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정 대표와 민주당 주류 측이 범민주계 최대 라이벌이자 비주류 좌장 격인 정 의원까지 겨냥하기 위해 대선자금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정 대표와 주류 측은 4·29 재보선 때 텃밭인 전북지역 두 곳을 ‘무장해제’ 상태였던 정 의원과 정 의원의 지원을 받은 신건 의원에게 빼앗기는가 하면 5·15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비주류인 이강래 원내대표에게 원내 사령탑을 내줘 당권을 위협받는 처지에 몰린 바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초대형 사건이 터져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등 대반전의 기회를 잡고 있지만 정 의원을 정점으로 한 비주류 측의 도약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사자들은 고개를 젓고 있으나 정 대표와 민주당 주류 입장에선 대선자금 카드야말로 이 대통령과 내부 경쟁자인 정 의원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는 다목적 카드인 셈이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을 옭아매기 위해 2002년 대선자금 및 당선 축하금을 은밀히 파헤치는 동시에 정 의원의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내사를 전개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 의원과 가까운 일부 기업인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수십억 대의 비자금을 발견하고 이 돈이 지난 대선 때 정 의원 캠프에 유입됐는지 여부를 은밀히 추적했다는 것이다.
검찰과 정 의원 측은 이 같은 소문을 일축하고 있지만 이 대통령의 대선자금 의혹 사건이 민주당의 고발로 수면 위로 부상한 만큼 정 의원 또한 검찰 수사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사태로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등 조직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검찰이 땅에 떨어진 자존심과 명예회복 차원에서 여야를 망라한 ‘대선 X파일’을 성역 없이 파헤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2007년 대선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될 경우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은 다시 한 번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