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 캡처.
청와대는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해 국민과 소통하는 창구를 넓히겠다는 취지로 국민청원 게시판을 만들었다. 청와대는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사안에 대해선 입장을 밝히겠다고도 했다. 청와대는 26만 건을 기록한 소년법 폐지 청원에 대해서 동영상을 통해 답변한 바 있다.
낙태죄 폐지의 경우 청원에 중복 참여하는 방법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이를 독려하는 글이 발견돼 도마에 올랐다. 중복 투표에 의한 결과이므로 청원이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쪽에선 “다른 청원들에 대해선 중복 투표에 관심을 두지 않더니 (낙태죄 폐지가)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선다.
청원 게시판은 SNS나 포털사이트 계정 등을 이용해 4가지 방법으로 로그인할 수 있다. 하나의 계정으로 서명한 후 크롬 시크릿 모드나 다른 브라우저를 통해 다른 계정으로 다시 서명이 가능하다. 기자가 직접 해 보니 IP주소를 바꾸거나 할 필요 없이 쉽게 중복 서명을 할 수 있었다. 인터넷 창을 껐다 켜 다른 계정을 통해 로그인만 하면 될 정도였다. 하나의 사이트에 여러 개 아이디를 가지고 있을 경우 참여할 수 있는 횟수는 더 증가한다.
청원의 신뢰도 문제뿐 아니라 청원 게시판이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고, 다툼의 장이 되고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립되는 내용이 중복적, 경쟁적으로 올라오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담긴 글들도 눈에 띈다. 청와대가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 측은 사이트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했지만 청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관리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20만 명의 서명을 넘은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한 네티즌은 “검찰에서 특별한 증거나 이유가 없으면 재심을 할 수 없다. 청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피해자가 또 생길 수 있다”거나 “심신미약이라고 형을 적게 줬던 게 말이 안 된다”는 공분도 들린다. 한 네티즌은 “청원 취지에 공감한다. 청원을 통해서 문제가 공론화가 된다면 조두순 신상공개라도 가능할 것”이라고도 했다
최근엔 자유한국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청구 청원이 게시판에서 화제를 모은다. 청원자는 “자유한국당이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민의를 배반하며 적폐세력과 결탁하는 등 반민주적 행위로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며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다”며 헌법을 위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정당을 인민재판 하는 것은 위헌이다”라는 반박도 나오지만 “국정 농단의 주역인 정당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찬성 쪽이 주를 이룬다.
이처럼 여러 뒷말과 부작용이 나오고 있지만 청원 게시판의 긍정적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낙태죄 폐지 청원이 20만 건을 넘기자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SNS를 통해 “이미 20만 명 넘는 국민들이 청와대에 청원을 접수했다”며 “여성의 낙태를 더 이상 범죄시해서는 안 된다는 시대적 흐름이 확인된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 지지와 관심이 높은 청원의 경우 국회 입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김봉석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초빙교수는 청와대 게시판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주장에 대해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청원 사이트는 갈등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화해 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중복 서명 문제는 ‘청원의 장’에 대한 시민적 참여의식과 책임성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인터넷 청원 사이트가 있다. 미국은 2011년 개설된 ‘위더피플’을 통해 청원이 가능하다. 13세 이상 전 세계 시민 누구나 회원가입 후 청원할 수 있다. 청원서를 등록한 뒤 이메일 등을 통해 150명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청원서가 사이트상에 공개되고, 청원서를 등록한 날부터 30일간 10만 명의 지지를 받으면 백악관은 공식 검토에 들어가 60일 이내에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미국도 여러 개의 이메일로 중복 지지가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청원 사이트 체인지닷오아르지(change.org)를 운영한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 제도를 적극 장려하면서 새로운 정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예지 인턴기자 yezyhar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