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씨인가 거품인가 6·10항쟁 22주년이던 지난 10일 촛불을 든 시민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다.” “성난 민심을 힘으로 제압하려 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다.”
조문 정국과 6·10 대회를 거치면서 분출된 성난 민심을 바라본 몇몇 여권 관계자들이 던진 우려의 목소리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사태 이후 MB의 사과 및 국정운영 기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야권과 대학가, 시민단체, 종교·법조·문화계를 넘어 여권 내부로까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을 비롯한 차명진 임해규 정태근 김용태 권택기 조문환 의원 등 친이 직계 소장파 7인은 6월 2일 기자회견에서 “작금의 민심 이반은 단지 노 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전부가 아니다. 현 정부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심판이다”며 “국민의 뜻에 부합하게 국정 기조와 국정 시스템을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여권 내 권력 헤게모니 투쟁 과정에서 범 친이계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권력암투를 전개해 왔으나 ‘주군’인 MB를 직접 겨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이명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피켓도 등장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기폭제로 억눌린 민심이 분출되면서 ‘민주주의 위기’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MB는 이를 ‘왜곡된 민주주의’로 폄하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MB의 발언 속에는 최근의 ‘광장 집회’ 저변에 특정 세력의 정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인식과 함께 불법·폭력시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투영돼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야권과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지만 MB는 여전히 ‘마이웨이’를 고수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MB가 동요하고 있는 민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민심 이반 현상이 ‘이명박 때리기’를 넘어 조기 레임덕을 몰고올 수 있는 A급 태풍으로 진화될 것이란 우려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실제로 서울광장을 비롯해 전국 20여 개 지역에서 개최된 6·10 대회에 수십만 명이 참가해 ‘MB식 독재 심판’ 및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촛불에 불을 지폈다는 사실은 이런 우려감을 뒷받침하고 있다.
22년 전 민주화 주역이었던 40~50대 넥타이 부대가 다시 거리로 몰려들고 있고, 6·10 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들까지 시국선언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인터넷 세대인 이들 청소년들은 온라인을 통해 3000여 명이 시국선언에 동참했고, 6월 10일에는 전국 10여 개 청소년 단체 회원들과 전국 청소년 3000여 명이 직접 서울광장에 나와 시국선언을 했다. 1987년 6월을 뜨겁게 달궜던 6·10 민주화항쟁 때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은 특히 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주역이자 민주개혁 세력의 대부인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현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DJ는 6월 11일 서울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열린 6·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특별연설을 통해 “피맺힌 심정으로 말한다. 전직 대통령에게 정신적 타격과 수치와 분노를 준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인가”라며 포문을 열었다.
그는 작심한 듯 현 정부와 MB를 겨냥해 ‘독재’니 ‘악’이니 하는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사실을 이명박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문상객의 10분의 1인 50만 명만 소리를 냈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등의 거친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마치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때 무산됐던 추도사를 대신하는 듯한 비장감마저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한 발언에는 민주개혁 세력의 봉기를 부추기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져 있어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반 정부’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도 침묵으로 일관해온 청와대가 DJ의 발언에 대해서는 즉각 ‘반격’을 가한 것은 파문을 조기에 진화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12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국민화합에 앞장서고 국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전직 국가원수가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진은 DJ의 발언 직후 정정길 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긴급회의를 가질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자칫 DJ의 발언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반 정부’ ‘반 MB’ 정서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투영됐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DJ의 발언과 관련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틈만 나면 요설로 국민을 선동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해선 안된다”며 거센 어조의 성명을 냈는가 하면,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국가정보원이 불법 도청하게 해서 정치공작까지 했던 김대중 정권 시절이 민주주의 시대이고, 지금은 독재인가”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당 등 야당가에선 MB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마이웨이’를 고집할 경우 성난 민심이 ‘반 정부 투쟁’ 쪽으로 폭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반면 여권 핵심부에서는 현재의 반 정부 기류가 ‘확대재생산’된 측면이 있다며 정략적인 ‘MB 흔들기’에 국정기조를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