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전 총재의 서울 옥인동 자택. 이 전 총재는 외부일 정을 갖지 않고 찾아오는 지인들만 만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
대통령 후보 시절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보좌했던 한 인사가 던진 말이다. 지난 5일 돌연 미국에서 귀국한 이 전 총재의 ‘깜짝 출현’에 대해 한나라당 안팎의 반응이 무척 뜨거운(?) 것을 두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난달 7일 이 전 총재는 “스탠퍼드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후 한 달 만에 국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 전 총재는 귀국하자마자 대구에 들러 지하철 참사로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당일 저녁 서울 옥인동 자택에 돌아온 이후 바깥 출입을 자제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전 총재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한 인사는 “이 전 총재가 옥인동 자택에 머물면서 이따금 가족과 식사를 하러 나가는 것 이외엔 외부 공식 일정을 갖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측근인사는 “(이 전 총재가) 옥인동을 찾는 외부인사들만 만날 뿐인데 하루에 10명 정도의 손님이 방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방문객들은 주로 대선기간 동안 이 전 총재를 지원했던 법조계 및 사회지도층 인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측근인사는 “귀국 당일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이 일찍부터 옥인동에 찾아와 이 전 총재를 기다렸다”며 “귀국 다음날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이 옥인동을 찾아왔는데 정치인의 옥인동 방문은 이것이 전부”라고 밝혔으며 다른 정치인들의 방문 여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이번 귀국에 대해 “비자 변환이 주목적”이라 밝힌다. 현재 이 전 총재가 갖고 있는 비자는 여행용 비자이므로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기 위해선 연구목적의 장기체류에 맞는 새로운 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 측근들은 하나같이 “비자 문제만 처리되면 출국할 것”이라며 “(이 전 총재가) 정치에 일절 개입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국내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이번 이 전 총재의 귀국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4월3일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 총재의 이 같은 급작스런 귀국은 ‘창심’(昌心:이회창 전 총재의 의중)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권주자들 진영에서도 이 전 총재의 귀국을 두고 “예상치 못한 일”이라며 내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같은 반응은 ‘이 전 총재가 지금 꼭 국내에 들어왔어야 하는가’란 물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 선언을 한 이 전 총재는 지난달 7일 미국으로 떠나며 국내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그런 그가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불과 몇 주 남긴 시점에 돌아온 까닭이 석연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전 총재측은 비자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이 전 총재 정도 되는 인물이 장기 외유에 나서면서 준비를 그토록 허술하게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아해 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스탠퍼드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려면 지금의 비자로는 안된다”라며 “9·11테러 이후 비자 관련법이 개정돼 비자를 변환하려면 자신의 국적지로 가서 처리해야 하기에 일시 귀국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측근인사는 “지난달 미국에 갈 때 비자 때문에 한 달쯤 지나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이 전 총재가) 말씀하셨다”며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을 국내에 남아 지켜보는 것을 (이 전 총재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시 갖고 있던 여행용 비자를 들고 서둘러 떠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인사는 모친 건강 이상설에 대해 “(이 전 총재) 모친은 아흔을 넘긴 분(1911년생)인데 오히려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편”이라며 “모친의 병환이 위중해 돌아왔다는 일각의 보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비자 문제에 대해 이 전 총재를 보좌했던 또 다른 인사는 “미국 내에서도 변호사들을 통해 편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비자 변환을 명목으로 전당대회를 코앞에 둔 시점에 국내에 들어온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연구목적에 맞지 않는 비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새 대통령 취임식을 보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급히 떠났던 것과 비자 변환을 이유로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코앞에 둔 시점에 귀국한 것은 뭔가 앞뒤 문맥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 이 전 총재를 보좌했던 한 인사는 이 전 총재의 귀국 배경을 또 다른 시각에서 해석했다. 이 인사는 “대구 민심이 최근 지하철 사고로 인해 좋지 않으니 (이 전 총재가) 한 번쯤 와서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보고가 국내에서 미국으로 (이 전 총재에게)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 전 총재의 돌연 귀국 뒤에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가 있었다는 관측이다.
실제로 대구를 방문한 이 전 총재는 시민들로부터 대통령급에 버금가는 영접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대구 시민)의 대통령은 여전히 당신입니다”란 말까지 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당내에서 ‘이회창계’로 분류되던 한 인사는 “국내 정치권 인사 중 이 전 총재는 여전히 두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 며 “이 전 총재가 국내에 들어와 정치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런 시기에 한국을 찾은 것만으로 정치권이 들썩거린다는 것쯤은 이 전 총재 자신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라 고 지적했다. ‘정치 텃밭’이던 대구 방문에서 다른 정치지도자가 받을 수 없는 뜨거운 대접을 받은 것이나 전당대회를 둘러싼 ‘창심’논란 등을 감안하면 이번 귀국이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입장에서 취할 ‘적절한’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전 총재측은 열렬히 지지해줬던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을 때 찾아가 위로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인지상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안팎에선 대체적으로 이 전 총재의 귀국 행보에 또 다른 색깔을 덧붙이는 모습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 전 총재가 회고록 집필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를 출간할 때쯤부터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고 있다. 이 전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이에 대해 “아직 (이 전 총재가) 사회활동을 할 여력이 충분히 남아있는데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회고록을 집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이 전 총재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 원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정가의 시각처럼 이 전 총재의 귀국에 또 다른 ‘창심’이 담겨 있는 걸까. 이래저래 이 전 총재의 향후 거취에 대한 정가 안팎의 관심은 좀처럼 식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