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해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 친노 인사들. 아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참여정부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과 맞물려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는 친노그룹은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정중동’ 행보를 보이면서도 DJ 측과의 물밑 접촉은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야권 주변에선 DJ와 친노그룹이 ‘반 MB’를 기치로 끈끈한 연대를 구축한 뒤 향후 전개될 야권 정계개편 과정에서 막강 파워를 행사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2007년 대선과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약화된 양측이 야권 내 위상 재정립 및 계파 부활이란 공통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월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 일각에선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DJ와 친노그룹이 ‘어게인 2002’를 꿈꾸며 정치적 재도약에 의기투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문 정국’ 이후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는 DJ와 친노그룹 간의 심상치 않은 연대론 속으로 들어가 봤다.
“내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정이다. 10년을 같이한 동지라 더 충격적이다.”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DJ가 충격과 비통함을 실어 던진 발언이다. ‘내 몸의 절반’ ‘10년 동지’ 등의 표현은 DJ가 노 전 대통령을 민주개혁세력을 이끌어 온 정치적 동반자로 여겨왔음을 방증하고 있다. DJ의 발언은 DJ와 노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친노그룹 사이에 온기류가 형성되는 기폭제가 됐다.
DJ는 5월 28일 서울역에 마련된 분향소를 방문해 ‘민주주의 위기론’을 설파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통해 했고, 장례식 당일(5월 29일)에는 권양숙 여사 등 유가족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기도 했다. ‘조문 정국’ 이후에도 DJ는 MB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 빗대는가 하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주장하는 등 ‘반 MB’ 전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DJ의 대여 강경 노선은 소리쳐 울고 싶어도 여론의 역풍을 고려해 참고 또 참고 있는 친노그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친노그룹으로선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검찰의 편파·보복 수사 논란과 맞물려 현 정부와 MB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고 반기를 들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을 것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49재가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대여 투쟁 노선을 드러낼 경우 여론의 역풍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친노그룹은 북받치는 분노를 억제하면서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문 정국’ 이후 전 사회적으로 확산됐던 시국선언 열기가 차츰 식어가면서 ‘반 MB’ 정서 또한 사그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 민주개혁세력의 대부이자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DJ가 꿋꿋하게 ‘민주주의 위기론’을 설파하면서 ‘반 MB’ 전선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친노그룹은 정치적 동질감을 넘어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던 한명숙 전 총리가 DJ에게 추도사를 부탁했던 것이나 6월 16일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전 장관 등 친노 핵심인사들이 오찬 자리를 마련한 배경에는 DJ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적 동반자로서 끈끈한 연대를 모색하고자 하는 복심도 어느 정도 투영돼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날 오찬에서 DJ는 ‘친노그룹 역할론’을 주문하는가 하면 문재인 전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내년 지방선거 때 부산시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선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매개로 정치적 동질감과 뜨거운 동지애를 재확인한 DJ와 친노그룹이 물밑 연대를 통해 10년 진보 정권에 대한 평가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약화된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 공동보조를 맞춰 나갈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DJ의 복심으로 통하는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친노그룹 인사들에 대한 복당론과 문재인 전 실장의 부산시장 출마론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관측을 부추기고 있다. 박 의원은 6월 24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친노그룹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친노 신당설과 관련해 “친노그룹이 신당을 창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친노 인사들의 민주당 합류 시기와 관련해서도 “대개 야권의 수혈이나 통합은 선거를 앞두고 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은 10월 재보선 또는 내년 초 지방선거 준비를 위한 이벤트가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DJ 측과 친노그룹이 신당 창당이나 민주당 복당 문제 등과 관련해 사전 교감 내지는 조율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발언이다.
이와 관련, 최근 기자와 만난 친노그룹의 한 관계자는 “친노 핵심 인사들이 복당론 등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 DJ 측과 의견을 교환할 가능성이 높다”며 “친노그룹의 정치 재개가 불가피한 만큼 핵심 인사들이 민주개혁세력의 상징인 DJ와 정치적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DJ와 친노그룹 간의 전략적 연대론에 힘을 싣고 있다. 양측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자 10년 진보 정권을 이끌어 온 핵심 정치세력이다. 실제로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의 정치 이념과 철학을 승계한 정권이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노무현 후보가 열세를 극복하고 ‘광주 경선 돌풍’을 바탕으로 대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DJ와 당시 핵심 실세그룹이었던 동교동계의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돈 바 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도 DJ와 동교동계는 물심양면으로 노 전 대통령을 도왔다.
하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 DJ와 노 전 대통령은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초기에 실시된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DJ는 최대 치적으로 평가 받아온 ‘햇볕 정책’이 크게 훼손됐고, DJ 측근들이 ‘줄구속’되면서 DJ와 노 전 대통령의 ‘앙금의 골’은 깊어갔다. 2006년 11월 노 전 대통령이 동교동을 직접 방문하는 등 화해 행보를 걸었지만 두 사람의 앙금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었다.
DJ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충격과 함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반 MB’ 전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배경에는 생전에 다 풀지 못한 두 사람 간의 애증도 어느 정도 투영돼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DJ는 7월 3일 뒤늦게 공개된 노 전 대통령 추도사에서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라는 애절한 문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친노그룹은 DJ의 행보에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정치적 신뢰감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몰락 위기에 처한 친노그룹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주가가 급상승하면서 재기의 동력은 확보한 상태지만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감안하면 재기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란 시각이 적지 않다. 따라서 부활을 노리는 친노그룹이 민주개혁세력의 대부이자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DJ와 연대를 모색하는 것은 생존 플랜과 맞물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49재(7월 10일)가 끝나고 10월 재보선 정국이 다가오면 친노그룹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친노그룹 주변에선 일부 친노 핵심 인사들의 10월 재보선 출마론 및 내년 지방선거 출마론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조문 정국’ 이후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장관, 문재인 전 실장, 김두관 전 장관 등 핵심 인사들이 각각 서울시장, 대구시장, 부산시장, 경남지사에 출마할 것이란 구체적인 얘기도 나돌고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산시장 출마설이 나돌고 있는 문 전 실장의 경우 얼마 전 한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33.3%의 지지율로 허남식 현 부산시장(39.3%)에 이어 2위를 차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 장관은 26.7%의 지지율을 보여 김태호 현 경남지사(41.5%)와의 격차가 14.8%p밖에 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7월 1일 <영남일보>가 대구경북 지역민 3100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구시장 선호도를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는 유 전 장관(15.7%)이 2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범일 현 대구시장(29.3%)이 1위를 차지했고, 한나라당 서상기(10.0%) 유승민(7.3%) 의원이 유 전 장관의 뒤를 이었다.
이들 친노 핵심인사들이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할지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중동’ 행보에도 불구하고 급등하고 있는 친노 핵심인사들의 지지율과 선호도를 감안할 때 이들의 출마가 현실화될 경우 내년 지방선거 판도에 일대 파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DJ와 친노그룹 사이의 온기류가 정치적 연대론으로 구체화될 경우 범민주계와 야권의 역학구도에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이고, 차기 대선지형 또한 격랑이 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조문 정국 이후 ‘민주주의 위기론’과 ‘반 MB’를 기치로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는 DJ와 친노그룹의 연대론이 언제 어떤 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지 하한 정국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전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