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9일 병역법 조항 위헌 여부에 관한 공개변론에 참석하기 위해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
헌재가 본안 심리에 착수함에 따라 미디어법 처리 위법성 여부를 판단할 재판관 9명의 면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은 그동안 법적인 판단과 양심에 따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 사건을 처리해 왔지만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예상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는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았다. 여야 정치권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극한 대치를 연출하고 있는 ‘미디어 전쟁’의 승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이번 권한쟁의 심판에서 헌재 재판관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권한쟁의 심판은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로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할 경우 헌재가 책임소재 및 위법성을 판단하는 제도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방송법 재투표가 ‘일사부재의 원칙’에 어긋나는지 여부와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리투표 의혹이 사실일 경우 그것이 국회법을 위반하고 야당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는지 등을 가리는 것이다. 권한 침해가 인정될 경우 원칙적으로 가결은 무효가 된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헌재는 참여정부 시절에 사학법 개정안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을 한 사례가 있다. 2005년 12월 사학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당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의 대리투표 및 질의토론 생략을 이유로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헌재는 “국회 회의록 등에 따르면 대리투표 등 사실관계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헌재가 당시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따라서 헌재가 이번에도 청구를 기각해 여당에게 힘을 실어줄지 아니면 야당의 손을 들어줄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미디어법 처리를 둘러싼 무효 논란은 사학법 개정안 처리 때와 달리 형식과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헌재가 청구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방송법의 경우 이윤성 국회 부의장이 투표종료를 선언한 뒤 바로 재투표에 들어간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만큼 위법성 여부를 치밀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논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또 한나라당의 대리투표 의혹과 관련해서도 각 방송사들의 증거화면, 현장 상황에 대한 증언 등이 확보된 만큼 헌재가 심판 청구를 인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권한쟁의심판 사건이 인용되려면 헌재 소장을 포함해 재판관 5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공교롭게도 이강국 소장을 포함한 재판관 9명은 모두 참여정부 때 임명됐다. 이강국 소장과 이번 사건 주심을 맡은 김희옥·송두환 재판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명했다. 이공현 재판관은 최종영 전 대법원장이, 김종대·민형기 재판관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각각 임명됐다. 조대현 재판관은 임명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이동흡 재판관은 한나라당이 각각 추천했고 목영준 재판관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합의로 임명됐다.
출신 지역은 영남(김희옥 김종대 이동흡)과 호남(이강국 이공현 조대현)이 각각 3명이고, 충청(송두환 민형기) 2명, 경기(목영준) 1명이다. 출신 대학은 김희옥 재판관(동국대 법대)을 제외한 8명 모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법조 경력 또한 김 재판관(검사 출신)을 제외한 8명이 판사 출신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헌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법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정치적 판단도 고려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헌재는 참여정부 시절 최대 사건으로 꼽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을 기각해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을 궁지로 몰아넣은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 청구된 ‘종합부동산세 위헌소송’에서는 일부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노 전 대통령이 ‘강남 불패’ 신화를 깨뜨리겠다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종부세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바 있다. 사회적 파장이 컸던 만큼 헌재도 종부세 위헌 결정에 따른 후폭풍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헌재와 접촉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외압’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헌재 재판관 9명 중 8명이 종부세 납부 대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판결 시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노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17회)이자 사법연수원 시절 친목모임인 ‘8인회’ 멤버였던 조대현·김종대 재판관은 논란이 된 종부세법 조항들에 대해 모두 ‘합헌’ 의견을 내 주목을 받았다.
헌재는 또 지난해 11월 27일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독점을 가능케 한 현행 방송법 규정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려 ‘현 정부와 코드 맞추기 판결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헌재의 결정이 올 연말까지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광고시장을 경쟁체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입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재의 결정에 당시 전국언론노조와 지역방송협의회 등은 성명서를 통해 “헌재마저 정치와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것 같아 매우 서글프다”고 성토한 바 있다.
진보개혁 진영과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종부세 위헌 결정과 방송법 규정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등이 잇따르자 ‘정권 코드 맞추기’ ‘가진 자 편들기 판결’이라며 헌재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진보 진영 주변에선 정권의 변화에 따라 중립성이 흔들리는 듯한 헌재의 결정은 자칫 국민의 사법 불신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일부 세력이 ‘여론재판’ 식으로 헌재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헌재는 여야 정치권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과 직결된 이번 사안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 법과 양심에 따라 결정할 수 있을까. 국민적 시선이 헌법재판소로 향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