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이어지는 뱃길. 선상에 오르면 주 변으로 조각조각 섬들이 흐른다. 왼쪽은 땅끝탑, 오른쪽 은 일출을 보는 남녀. | ||
삶은 방향이다.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작이 되고 끝이 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으로 달려가는 길은 ‘제자리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시작 지점을 찾기 위해 ‘토말(土末)’로 떠나는 계미년의 아침은 밝기만 하다.
땅끝(토말)으로 가는 길은 해안 절벽을 위아래로 안팎으로 부드럽게 휘두른 아름다운 길이다. 연초마다 이곳 역시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으로 소동을 빚는다. 가다 멈춘 차에서 내려 2~3km의 긴 거리를 행군하는 것쯤은 당연지사라 생각될 정도다. 새로운 해가 뜰 때마다 새 날이 열리니 사실 섣달 그믐이나 정월 초하루라는 개념 자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심리에 크게 영향을 준다.
땅끝이라 하여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한반도의 등줄기가 마지막 기염을 토하는 달마산 사자봉(122m) 마루에 ‘토말비’ 하나 당그랗게 서있을 뿐이다.
사자봉 아래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곳은 원래 지명이 갈두마을이다. 전남 해남군 두륜면 갈두리 해변마을. 섬 빼고 한반도에 붙은 땅에서 위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 하여 땅끝으로 공인된 곳이다. 마을 사람들도 우편엽서에 주소 쓸 때를 빼고는 으레 땅끝이라 부른다.
땅끝교회, 땅끝횟집 등등 둘러보는 간판마다 붙은 이름들이 이곳의 정체성을 부연하고 있다. 정체성이 지나쳐 온통 ‘땅끝’ 이름을 도배한 견고한 상혼이 씁쓸한 듯도 하지만, 그렇다고 땅끝에서 느낄 시작과 끝에 대한 상념의 여백마저 없어진 건 아니다.
신년 첫날 선창에서는 ‘풍어기원제’가 열린다. 마을 주민들이 요귀를 물리치고 풍어를 축원하는 새해 고사 형식의 전통굿판이다. 용왕신이니 조상신이니 하는 말이 거북스러우면 ‘띠뱃놀이’라 불러도 된다.
바닷속에서 나는 수초인 띠[芼]를 배모양으로 엮어 밥을 가래로 담아 싣고 배 위에 5방(五方)기와 선기(船旗)를 꽂은 것이 ‘띠배’다. 여기에 짚으로 만든 뱃사공을 달아매 바다에 띄우면 띠배는 물결이 흐르는 대로, 짚사공이 노젓는 대로, 해신이 부르는 대로 뒤뚱뒤뚱 흔들리며 바다로 나간다. 이날 띠배가 가는 쪽의 바다에는 풍어가 든다고 한다.
풍어를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지고 제 순서가 되어 띠배가 선창을 떠나가면 마당에선 한바탕 흥겨운 풍물놀이가 펼쳐진다. 그제서야 도시에서 온 ‘촌사람’들도 어민들의 손에 이끌려 함께 어우러지며 막걸리를 마시고 춤을 춘다. 희망이란 한데 어울림에서 나온다.
▲ 새해 첫날 땅끝마을 사람들은 수초의 일종인 ‘띠’로 엮어 만든 띠배를 바다에 띄우며 풍어를 기원한다.(위), 뛰어난 조경이 돋보이는 세연 정은 윤선도가 인공연못을 만들어 노닐던 곳이 다. | ||
겨울바다 앞에서는 누구나 간결해진다. ‘춥다’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을 만큼 꽁꽁 얼어버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온실 같은 도심에서의 나약함은 바닷바람의 매서운 사위 앞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장하게 된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겨울은, 바다는, 견뎌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뱃길로 약 12km 떨어진 보길도는 완도군에 속한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 덕분에 감귤재배가 이뤄지고 있는 이 섬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주종을 이룬다. “행여라두 가을에 낙엽 보러 오지는 마세여어~” 농을 던질 만큼 계절을 잊은 푸른 섬이다.
보길도를 쉽게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차를 갖고 가는 것이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보길도내의 셔틀버스나 갤로퍼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현지 베스트 가이드인 운전기사의 재미있는 입담도 들을 수 있는 데다 전문 답사가이드와는 차별되는 지역정보도 챙기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돌다보면 섬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올록볼록한 산세가 느껴진다. 특히 부용동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연꽃을 닮았다고 느껴질 만큼 산봉우리가 꽃잎처럼 가지런하고 부드럽게 살포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만년을 보낸 곳. 병자호란(1636년) 때 고산은 해남에서 황급히 전재산을 정리하여 모집한 장정들과 의병들을 배에 태우고 강화로 향하다가 그만 왕이 항복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전해듣는다. 낙심한 고산은 그길로 뱃머리를 돌려 멀리 신천지를 찾아 떠났다.
고산은 본래 제주도를 찾아가려 했던 것인데, 남해안을 돌아가다 한송이 부용화(연꽃)처럼 바다에 떠있는 섬 보길도를 발견했다. 이곳에 가솔들과 함께 정착하여 부용동이라 하였으니 보길도의 중심은 역시 부용동 정원이다.
▲ 보길도 예송리에는 보기 드문 깻돌해변이 있다. 돌 하나 만 집어가도 벌금이 3백만원이라고. | ||
크게 세 곳으로 나뉘는데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아래 낙서재, 맞은편 석룡대 밑의 동천석실, 부용동 초입에 위치한 세연정이 대표적이다. 부용동을 빙 둘러 위치한 세 곳은 각각의 쓰임새와 역할이 뚜렷이 구별되어 있었다.
낙서재는 생활 공간. 철저히 잠을 자고 식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했다. 길 건너 산 중턱의 동천석실은 사색의 공간이다. 섬속인데도 파도소리 바람소리 한점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이다. 관광객들은 한결같이 감탄한다. “이런 곳에 있기만 해도 도가 절로 닦이겠구만!!”
오르는 길도 쉽지 않은 산 중턱의 바위 끝에다 도르레를 달아서 반대편 낙서재로부터 식사를 날라오기도 했다니 지금도 상상키 어려운 환상적 낙원을 벌여놓았던 모양이다.
또 한곳 세연정은 놀이의 공간으로 주로 연희를 즐기던 곳이었다. 세연정 연못 위에 조그만 배를 띄우거나 동대와 서대 등의 석대 위에서 여러 빛깔의 옷을 입은 무희들을 춤추게 했고, 더러는 산 중턱 옥소대에서 춤추게 하여 아래 연못에 비치는 무희들의 자태를 감상했다고 한다.
자연 계류를 이용해 연못(세연지)으로 만든 것이며, 다시 그 물을 끌어들여 회수담이라는 네모난 인공연못을 만들고 연못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판석보’(일명 굴뚝다리)를 세우기까지 치밀한 건축 수리학을 적용한 것이므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당대 최고의 조경학자로도 손색이 없다.
특정한 정파들이 나서 왕조를 쥐락펴락하는 그 혼란한 시대에 한 재능많은 선비는 이렇게라도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어 그의 식견을 집약해보임으로써 원대한 문명국의 꿈을 접는 아픔을 달래려 한 것은 아닐까. 한겨울인데도 세연정의 커다란 동백나무는 철 없는 선홍빛 동백꽃을 피우고 있다.
버스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예송리 해변. 돌 하나만 집어가도 벌금 3백만원이라는 경고가 있는 보기 드문 깻돌해변이다. 박수운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