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에게 하루 10여 차례 ‘역도패당’ 등의 폭언을 퍼붓던 북한 관영방송들은 8월 23일 북한 조문단의 청와대 방문을 계기로 호칭이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몇몇 보도에서는 여전히 비난공세를 취하는 등 갈팡질팡하다가 27일이 돼서야 완전 중단됐다. 과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과 다르다는 얘기다.
선군정치를 표방해온 북한 권력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군부 일각에서 “이럴 거면 왜 대남 목소리를 높였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뒤섞여 나오고 있다는 첩보들도 속속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는 사례들도 드러난다. 지난 8월 28일 북한 군부는 금강산 지역 남북을 잇는 동해선 통신선을 이용해 짤막한 통지문을 보내왔다. “서해지구 군 통신선로의 점검과 보수작업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나흘 뒤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정상화했다”고 알려왔다.
우리 정부 당국자는 “지난해 11월 대남 강경조치들을 내놓는 선봉에 섰던 북한 군부가 일방적으로 단절했던 통신선을 아무 명분도 없이 스스로 복원한 건 전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월 “대남 전면 대결태세에 진입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 “서울이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멀지 않다”는 등 위협성 발언의 수위를 올렸다. 서해에서 도발을 불사할 것 같은 움직임도 한 차례 있었다. 하지만 북한 군부는 아무런 추가 행동 없이 그대로 꼬리를 내리는 형국이 됐다.
8월 16일 묘향산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난 김정일 위원장의 언급은 북한 군부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란 게 우리 당국의 분석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북한 군부가 억류 중이던 우리 어선 연안호 문제에 대해 “이미 군부에 대해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서도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사실상 재발방지 약속을 해주었다. 북한 공안당국이 ‘체제에 반하는 범죄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억류 중이던 개성공단 근로자 유성진 씨가 풀려난 건 현정은 회장이 김 위원장을 만나기 사흘 전이었다.
이런 입장선회 징후는 지난 8월 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 처음으로 드러났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김 위원장은 클린턴에 대해 최대의 예우를 해주고 선물도 줬다. 당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대해 핵과 6자회담, 미사일 문제 등을 놓고 ‘철천지 원수’ 등으로 관영매체를 통해 비난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양새였다.
이후 북한의 대남 유화공세는 지금까지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서울에 온 북한 특사조문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청와대 방문이 여의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자 초조한 모습을 드러냈다. 면담이 결정돼 청와대를 찾은 김 비서는 방명록에 ‘오늘은 바쁘실 텐데 저희들을 만나줘서 고맙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정부 관계자는 “과거 김 위원장의 특사가 서울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평양에 돌아가 숙청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북한이 굽히고 들어오는 분위기란 것이다.
이런 북한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대해 정보당국과 전문가들은 달러 돈줄이 완전히 막힌 게 결정적 요인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금강산 관광 대가로 매월 들어오던 현금이 중단됐고 핵 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움직임이 거세다. 한 정보 관계자는 “지금 북한은 몇 천 달러가 급할 정도로 외화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김정일 위원장 일가의 통치 관련 자금 흐름까지도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부 경제사정도 좋지 않다. 지난 4월 시작한 생산 증대운동인 ‘150일 전투’가 오는 16일께 끝난다. 하지만 결과는 비관적이다. 자재와 장비는 물론 원료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주민들의 피로도만 극에 달해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50일 전투는 후계자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셋째아들 김정운의 업적으로 삼기 위해 기획된 만큼 성공적 완수가 필요한데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여기에 김정일 후계체제 문제 자체가 흔들리는 조짐도 나타난다. 북한이 최근 김정운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벌여온 교육 등을 중단했다는 첩보도 그중 하나다. “김정일 장군님이 아직 혈기왕성하시고 앞으로 통치활동에 문제가 없으니 후계문제는 논의하는 걸 중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이야기로 미뤄볼 때 뭔가 김정일 후계체제와 관련해 중대한 상황변화가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북한 조문단의 서울 방문 때 청와대는 “특별한 메시지가 없으면 김기남 비서를 만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세웠었다. 또 국정원은 북한 고위대표단이 올 때 내주던 남북 행사용 최고급 세단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통일부 등은 렌터카 업체를 이용해 의전용 차량을 조달해야 했다. 김 비서 일행은 이런 분위기를 철저히 체감했을 것이란 게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라인은 북한이 진정한 태도변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대북제재 모면책으로 유화공세를 취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연안호 석방이나 개성공단 근로자 송환, 남북 간 통행 및 체류제한 조치 등의 원상회복은 북한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내부적으로 북한이 원하는 금강산 관광 재개나 관계복원은 당국 간 대화로 협의해 추진한다는 입장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문제는 김 위원장이 앞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다. 남측의 냉담한 태도를 돌려세우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대남조치를 취할 경우 남북관계는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핵 포기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복잡한 북한 내부 사정에 발목이 잡혀 대남 유화접근 행보를 계속할 수 없게 될 경우 남북관계는 출렁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추석을 계기로 오는 26일부터 시작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전후해 북한의 대남접근 움직임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것이란 분석을 조심스레 내놓고 있다.
김성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