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후보자는 ‘불도저’ 이 대통령의 약점을 커버해줄 화합형 인물이라는 점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영남발 일방독주’를 끊어줄 충청 출신 주자라는 점에서 여권 핵심부의 기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그리 살갑지 않다. 당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딱 1년 정도 쓸 연탄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일 뿐이다”라며 그의 부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화합형 총리로 일단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이명박 정권. 현 정권이 한때 야권 대권주자의 대안으로 꼽혔던 정 후보자를 구중심처에 데려온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장차 그를 ‘대마’의 초석으로 삼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사석’으로 쓰고 도태시킬 것인가. 사활이 정 후보자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 보기엔 여권의 장벽이 너무 높아 보인다. 정운찬 총리 영입 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추적해봤다.
지난 3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총리 내정 소식에 한나라당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총리 인사에 내기를 걸었던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예상치 못했던 카드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야말로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총리실 입성이 가장 유력했기 때문이다(6면 기사 참조). 하지만 그의 총리직을 수용할 경우 ‘뒷방 노인’ 신세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로서는 결사적으로 심 전 대표의 총리행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청와대 정무라인은 심 전 대표 ‘대타’ 찾기에 백방으로 뛰었다. 결국 그들은 4개월을 돌고 돌던 총리 인선을 며칠 사이에 ‘정운찬’이라는 히든카드로 막은 셈이 됐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심도 있게 검토하지 않은 정 후보자 카드를 시간이 없어 서둘러 결정한 후유증이 있을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신자유주의자(경제 메커니즘을 최대한 시장 자율에 맡기는 학파)들로 꽉 찬 여권 핵심부에 정운찬이라는 케인지언(정부 개입과 규제를 중시하는 학파)이 들어가 ‘융합’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도 나온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심 전 대표의 경우 충청 지역 맹주라는 정치적 위상에 행정의 달인이라고 불릴 만큼 부처 장악력 등이 뛰어나 검증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정 후보자의 경우 총리 인선이 지연되면서 막판에 극적으로 결정했다. 이는 총리직에 대한 정무·전략적 고민에 따른 결과라기보다 일단 사람을 뽑은 뒤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꿰어 맞추기식 인사로 보인다. 혼기가 꽉 찬 노총각노처녀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서둘러 결혼을 한 경우와 같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우려에도 청와대는 정 후보자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사실 이번 인사는 막판에 급하게 결정됐지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아군을 빼앗긴’ 안타까움이 흘러나올 정도로 합격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정 후보자는 부드럽고 합리적인 스타일로 이 대통령의 일방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상당 부분 희석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정 후보자가 용산 참사에 대해 전격적인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과 같은 진보진영에 어필하는 전향적인 행보를 이어간다면 이 대통령의 독재 이미지를 상당부분 걷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던 친이그룹은 정 후보자를 통해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 내지 관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 됐다. 이번 정 후보자 영입에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적극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친박 진영이 정 후보자 영입에 대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유도 아직은 적수가 되지 않지만 박 전 대표가 어찌 됐든 정 후보자와 같은 반열의 대권주자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분명 마이너스 요인이 있다. 여기에 박 전 대표가 영남을 발판으로 충청을 거쳐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대선 필승 전략을 짤 경우 정 후보자가 충청에서 그 교두보를 끊어놓을 수도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정 후보자의 등장은 민주당에게도 아픈 카드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패배 이후 국민들의 관심을 끌 만한 참신한 대권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 후보자가 비록 2007년에 정치적 도전에 실패한 뒤 ‘재수’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분명 민주당에게는 매력적인 존재였다. 참신한 인물이 별로 없는 민주당은 이제 차기 대선과 관련해 인물 중심보다 정책 개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대선 구도가 간결하게 됐다며 환영하는 분위기이지만 인물의 인지도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대선 구도상 정 후보자의 ‘적군 징집’은 민주당에게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갑자기’ 정 후보자를 선택했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잘한 결정”이라며 그의 다목적 용도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친이그룹 일부는 정 후보자를 여권의 ‘볼매’(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적군 기지’에서 날아온 정 내정자가 여당의 한복판에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세울 수 있을까. 지금부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먼저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그의 등장에 대해 “딱 1년 쓰고 용도 폐기될 불쏘시개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국민 입장에서는 중도론자인 그를 이명박 대통령이 선택한 것에 대해 고무적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여당) 입장에서는 일단 써 보는 것이지 굳이 그를 대권 주자로 밀어 올릴 필요는 없다. 기회를 잡은 정 후보자가 어떻게 자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 (왼쪽)정세균 대표 (오른쪽)박근혜 전 대표 | ||
그렇다면 정운찬 후보자는? 일단 답이 부정적이다. 친이세력의 한 재선 의원은 총리 인선 발표 직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교수로서 명망이 높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은 검증되지도 않았고, 별로 경쟁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만한 대권주자의 반열로 올라서야 하는데 그를 잘 아는 의원들일수록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와 경기고 동문인 정치권 인사 A 씨는 더 구체적으로 정 후보자의 ‘정치적 무능’을 꼬집는다. 정 후보자는 예전 조순 전 서울시장이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때 그의 밑에서 조교 생활을 하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때 그와 함께 조교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 현 강남구청장인 맹정주 구청장(한나라당)도 있었다고 한다. 두 조교는 은사인 조순 씨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자 매일 그의 집으로 출근하면서 정치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당시 조순 후보의 집에 선거 전략가로 출입했던 A 씨는 같이 일을 했던 정 후보자에 대해 “정치 스타일이 딱 조순 씨와 같다. 절대 불리한 것을 거스르며 과감하게 베팅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언제나 좌고우면하는 점이 똑같은 것이다. 당시 정 후보자는 선거 내내 부지런하고 성실했지만 어떤 면에서 리더의 소양보다는 참모 스타일이 잘 어울렸다고 본다. 그가 정치를 한다면 국회의원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대통령감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또한 정 후보자의 학창시절을 잘 아는 경기고 출신들 가운데 일부는 그에 대해 “대통령감은 아니다. 정치권에 진입하더라도 현실정치의 어려운 벽을 뚫고 돌파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런 그들의 ‘우려’는 지난 2007년 4월 그가 대선 레이스에서 자진 탈락하면서 일부 현실이 됐다. 당시 그는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중도 포기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 후보자가 그때 “특정 정파의 불쏘시개는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 점점 정치판의 ‘치어리더’로 전락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여권의 한 보좌관은 이에 대해 “여의도 정치판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그의 참신한 이미지는 지난 2007년이 정점이었다. 한 번 정치판에서 물을 먹은 사람이 다시 재기해서 세를 모으기는 쉽지 않다. 그때 이미 그의 내공이 검증이 됐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어떤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갈고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그가 기존 정치세력의 무관심과 견제, 그리고 스스로를 가두는 소극적 행보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상 화려한 컴백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후보자는 과연 그런 부정적 기류를 읽지 못하고 이 대통령의 총리 제안을 덥석 물었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경제학자인 그는 이미 정치적 계산을 끝냈을 것이다. 일단 이 대통령의 물밑 제안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정 후보자가 자신이 여권의 노리개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호랑이굴로 들어왔겠느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는 고건 전 총리 스타일과 비슷한 그가 어떻게 큰 결심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 대통령이 적어도 차기 대권 도전에 대한 협력을 약속했을 정도의 당근은 보장해주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정 후보자는 적어도 내년 4월 지방선거 전까지 청와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을 것이다. 여권이 깔아준 든든한 멍석에 정 후보자는 자신의 힘으로 춤을 춰 인상 깊은 ‘원맨쇼’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정치권에서는 정 후보자가 과거 김영삼 정권 시절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총재가 ‘대쪽 총리’ 이미지로 대권 후보로까지 급부상한 사례를 따라가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조언한다. 이 대통령이 굳이 코드가 맞지 않는 정 후보자를 선택한 까닭도 깔아 논 ‘중도실용’ 멍석에 신나게 자신의 뜻을 펼쳐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정 후보자는 청와대에서 한 시간가량 이뤄진 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필요할 때 바른 말씀 올릴 테니 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이 대통령은 “당연히 그래 주시길 기대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일단 청와대도 정 후보자가 자신의 정치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 후보자가 초기에 성공적으로 총리직에 연착륙할 경우 그것은 이 대통령의 중도실용 국정 철학을 그대로 구현해내는 동시에 박근혜 전 대표와 대등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한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권력 관리 프로그램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운찬 후보자의 ‘담력’이다. 이회창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정면으로 치고받으면서 순식간에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정 후보자도 그런 ‘용기’와 저돌성을 보여준다면 여당의 대권 지도는 백지 위에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