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으로선 가만히 앉아서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무장해제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최악의 경우다. 따라서 중도실용주의자 정 후보자를 최대한 키워 외연을 넓힌 뒤 박 전 대표와 정면승부를 펼치려 할 것이다. 반면 정 후보자로서는 ‘불임세력’인 친이 그룹이 결국 자신에게로 백기 투항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릴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불투명한 조건을 현실성 있게 붙여주는 ‘접착제’가 바로 이원정부제를 전제로 한 개헌이다. 여의도에서 조용히 퍼지고 있는 ‘이명박-정운찬 대권 밀약설’을 따라가 봤다.
명박 대통령이 여권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적군’ 출신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게 대권을 척 던져주겠다고 밀약을 했다면 믿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어떤 곳인가.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이전의 ‘9룡’을 비롯한 수많은 ‘잠룡’들이 수십 년 정치 공력을 쏟아 붓고도 대권 쟁취에 실패해 쓸쓸히 정치 은막의 뒤로 사라져간 보수 세력의 아성이다. 한나라당은 김 전 대통령(당시는 신한국당)을 배출한 뒤 ‘자가발전’에 실패,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을 끌어들여 정권을 재창출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누리던 영남 터줏대감들은 수도권 중심의 ‘굴러온 돌’이 권력을 가로채기 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 대통령도 따지고 보면 ‘굴러온 돌’은 아니다. 그는 지난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한나라당에 계속 비빌 언덕을 마련해뒀다. 형님 이상득 의원과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모종에 싹을 틔워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의 꽃을 피운 운 좋은 케이스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정 후보자는 사석에서 자신에 대해 ‘머리는 한나라당인데 가슴은 민주당’이라며 한나라당 입성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한 바도 있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전격 영입해 대권주자로까지 키우려고 하는 것은 정치공학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실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불가능한 발상이다. 더구나 현재의 한나라당에는 지난 1998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한 뒤 10년이 넘게 대권 하나만을 바라보고 질주 중인 ‘로열패밀리’ 출신 박근혜 전 대표가 떡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정운찬 카드’가 가당키나 한 것일까. 친박 그룹에서는 “아무리 정운찬이 설쳐도 박 전 대표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 하수 중의 하수”라고 반응한다. 그리고 여의도의 대체적 기류도 친박 그룹의 그것과 온도차이만 있을 뿐 시각차
는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이 정 후보자를 영입했을 때의 대체적 분석은 대권 구도 다각화, 박근혜 전 대표 견제, 충청 기반 구축 등과 같은 일반적 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계산은 적어도 이런 일차원적인 셈법보다는 두세 발짝 정도 더 나갔을 개연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양측이 차기 대권을 두고 ‘밀약’을 했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양측이 바라보는 이번 ‘인사’의 본질을 짚어보자. 먼저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운찬 총리 카드는 박근혜 대세론을 뒤엎기 위해 화력을 총동원하는 과정에서 나온 필연적인, 필수적인 대항마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박근혜 전 대표라는 ‘장외 대통령’의 하중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이 대통령에게는 레임덕과 퇴임 후 안전판 확보가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화두다.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여당 원내대표단 모임 때 신지호 의원이 “이명박 정부는 허니문도 없었지만, 레임덕도 없을 것”이라고 건배사를 하자 이 대통령이 ‘옳거니’ 하면서 서울시장 퇴임 때의 에피소드 한 자락을 늘어놓은 것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의원들에게 자신의 안전한 하산로 확보를 주문하는 우회적인 압박으로도 읽힌다.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난 친이 그룹의 한 핵심 인사는 이에 대해 “5년 단임제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게 레임덕 아니겠느냐. 이 대통령은 ‘여당 의원들을 어떻게 믿느냐. 그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나. 스스로 내 갈 길을 찾아야 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레임덕을 피하기 위해 ‘여의도 밖에서’ 절박하게 선택해야만 했던 카드가 바로 정운찬 후보자의 영입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대통령은 2인자를 절대 두지 않는 스타일이다. 기업에서 2인자가 회장을 대신해 결재를 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권력을 나눠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2인자는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다. 그럼에도 그가 정 후보자에게 ‘실세 총리’에 필적하는 권한을 주려 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 여권의 권력 재창출 상황이 절박함을 대변한다.
정운찬 후보자의 이번 ‘인사’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다. 정 후보자가 진보진영의 ‘변절자’라는 비난을 각오하고 이 대통령의 미끼를 덥석 문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 유리한 국면이 온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소장파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는 친이세력이 차기 대권 주자를 절대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볼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9룡’ 가운데 가장 ‘정칫밥’을 적게 먹은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총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신선했기 때문이다. 정 후보자가 민주당을 ‘배신’하면서, 진보진영에게서 ‘변절자’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한나라당에 들어간 이유는 자신이 친이 그룹의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대통령이 던져준 ‘확신’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자가 ‘내가 차기 대권 주자’라고 확신하는 또 다른 이유는 친이-친박의 갈등이 화해 국면을 넘어섰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친이 그룹에게 차기 대권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앉아서 지켜보느니 정운찬 카드로 최대한 저항해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여기에는 예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차기 대권을 ‘아군’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가져가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고 차라리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져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정서를 친이 그룹이 공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 후보자에게도 일단 최대한 협력을 해주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예측한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불신을 강고하게 붙여주는 접착제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개헌’이다. 정치권에서 여러 번 언급된 대로 친이 그룹은 이원정부제로 개헌을 해서 차기 집권이 유력한 ‘박근혜 대통령’의 힘을 빼고 권력을 균점할 태세다. 한 친이 의원은 이에 대해 “이번 개헌은 복잡한 쪽으로 하지 말고 권력 체제 하나만 고치는 원포인트 개헌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현 가능성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친이 그룹으로서는 헌법 전반에 대한 ‘수정’보다는 권력 체제 하나만 고치는 게 시간과 저항을 줄이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정 후보자를 통해 개헌 정국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이 대통령은 정 후보자를 이원정부제로 추진하는 개헌 정국에서 중도·진보 진영의 협조를 견인해낼 수 있는 여권의 몇 안 되는 ‘다중 코드’ 인사로 점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정 후보자는 진보진영에 폭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 대대적으로 정 후보자의 ‘변절’을 공격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가 이명박 정권에서 착근하게 되면 적극적인 지지층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 후보자가 자신의 인맥 지도에 들어 있는 장외의 진보·중도세력들과 연대 내지는 소통을 원활히 할 경우 이는 개헌을 결사 저지하는 민주당에 대한 압박 카드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정 후보자는 민주당에 있는 중도세력을 아우르고 그들을 정계개편의 바다로 나오게 할 부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현재 민주당은 방향타를 잃은 난파 직전의 배와 같다. 강력한 대권 주자 부재에 따른 총체적 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원들이 다음 총선 당선을 위해 한나라당과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추진할 경우 분명히 이탈 세력이 나올 수 있다. 현재 이 대통령이 야당 의원들과도 ‘소통’을 넓혀나가는 것은 그 전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정 후보자의 폭넓은 코드는 그들이 민주당을 뛰쳐나올 명분이자 바람막이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은 진보성향의 중도주의자들 영입에 더 공을 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선 “이명박 정권의, 민주당 이탈자 등을 끌어안는 등의 적극적인 이념 스펙트럼 넓히기 전략이 먹힐 경우 이것이 곧 자민당식 장기 집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까지 내다본다. 사실 정 후보자의 이명박 정권 ‘투신’으로 민주당은 더욱 ‘좌’쪽으로 정책을 클릭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그럴싸한 대권 인물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정책과 비전을 선명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 대선 이후 국민들의 보수성향화와 출산율 저하에 따른 주 투표층의 노령화 등으로 한나라당의 보수세력 장기 집권 기도는 어느 정도 그 틀이 잡혀 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보면 정 후보자의 이명박 정권 입성은 또 다른 중도·진보 진영 인사의 참여를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 향후 정계개편의 발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편 정 후보자에게 이원정부제 개헌은 이 대통령의 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매력덩어리임에 틀림없다. 그가 허세 총리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흙탕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리고 현재의 ‘박근혜 대세론’을 깨는 동시에 그가 대권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공간이 바로 이원정부제로의 개헌이다. 정 후보자가 한나라당 내에서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친다면 차기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넘어서는 ‘초실세 총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친 이재오 세력은 그의 ‘부상’에 대해 마뜩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박근혜가 되는 것보다는 정운찬이 낫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레임덕 포비아(공포)’에 빠진 이명박 대통령과 대권병에 빠진 정운찬 후보자에게 ‘대권 밀약설’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순진한 발상이지는 않을까”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