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를 건립한 태조(1392~1398) 때부터 제25대 왕 철종(1849~1863)의 통치기에 이르는 470여 년간의 왕조 역사를 담은 기록물이다. 사진은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사진=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를 건립한 태조(1392~1398) 때부터 제25대 왕 철종(1849~1863)의 통치기에 이르는 470여 년간의 왕조 역사를 담은 기록물이다. 여기에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이 두 실록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국권 침탈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역대 제왕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와 군사·사회 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전통 예술·공예·종교 등 조선 왕조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매일의 기록이 담겨 있다. 실록은 당대에 편찬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교체될 때마다 후임 왕의 지시에 따라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왕의 비서기관이 작성한 일기), ‘일성록’(국왕의 동정과 국무에 관한 기록)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됐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이다.
사초의 작성은 8명의 사관이 담당했으며, 이들 사관은 항상 모든 국무에 관한 회의에 입시해 왕과 관리들이 논의하는 내용에 대해 소상히 기록했다. 사관들은 때때로 누가 선행을 하고, 누가 악행을 저질렀는지 촌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기록의 보존과 사관의 신분 보장을 위해 사관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사초의 열람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실록’의 내용을 누설한 사관은 중죄로 처벌받았다. 조선은 실록을 환란과 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심산유곡의 격리된 사고들에 나누어 보관하였고, 이러한 사고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의 사회문화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조선시대의 금주령(禁酒令)에 대해 살펴보자. 요즘 ‘주폭’이란 단어가 지상에 오르내리듯, 당시에도 지나친 음주로 인해 사람의 본성을 해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경계해 왕이 수시로 금주령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주령’이란 단어가 모두 175번 등장하는데, 대부분 흉년 혹은 가뭄이 들 때 곡물을 아끼고 백성과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린 조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태종의 경우 “금주령을 내렸으나 술을 마시는 자가 그치지 않으니, 이것은 과인이 술을 끊지 않아서”라며 스스로 금주를 선언하고(태종 1년 4월 24일), 대궐 안의 술그릇을 모두 치우도록 명령하기도(태종 2년 7월 3일) 했다. 조선시대의 금주령은 농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흉년이 들면 금주령은 더욱 엄격히 시행됐고, 비가 내리거나 풍년이 들면 금주령을 시한부 해제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환자가 약을 대신해 술을 음용하거나 혼인, 제사 때 음복하는 일 등은 대체적으로 허용됐으며, 문과 및 무과의 급제자가 발표된 이후 3일 동안 금주령을 잠시 해제하기도 했다.
태조 때의 가회방 화재(집 143채와 왕궁의 미곡 창고 소실), 정종 때의 수창궁 화재, 세종 때의 한성부 화재(집 2000여 채 소실) 등 조선시대에는 유독 큰 화재사건이 빈발했다. ‘화재와의 전쟁’이 왕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을 정도인데, 특히 세종은 화재 대응 시스템을 구축한 최초의 국왕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인가가 밀접해 있어 화재가 크게 번진다는 이유로 밀접해 있는 인가를 헐고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화재에 대한 주요 대처 방안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세종은 화재를 대비해 돌과 흙이 섞인 벽으로 방화 건축을 하고, 성내 도로를 넓히고, 관청 안에는 우물 두 개씩을 파서 물을 저장하여 두고, 종묘와 대궐 안과 종루의 누문(樓門)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서 비치하도록 했다. 또한 화재에 대한 사후 처리를 위해 화마로 식량을 잃은 백성에게는 묵은 장류 300석을 나눠주도록 하고, 집안이 화재를 당한 백성이 군복무 중일 때에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두 달간 휴가를 주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아울러 도적들의 방화 및 일반 백성의 실화를 막기 위해 최초로 금화도감을 설치해 운용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화재에 대비해 정부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토록 한 것도 세종 때의 일이다. 한양에 기와집이 많아진 이유도 화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가집의 경우 화재 때 불길이 쉽게 옮겨붙기 때문에, 기와를 만드는 별요를 설치해 지붕에 기와를 덮도록 했는데, 수년이 지나지 않아 기와집이 절반이 넘었다(세종 6년 12월 7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처럼 조선의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들이 넘치도록 담겨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의 방대함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참고=‘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