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최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방문 결과를 보고 받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40여 분간의 밀담을 나눴다.청와대사진기자단 | ||
특히 박 전 대표 측은 최근 이뤄진 이 대통령과의 40여 분 밀담을 기점으로 그동안의 경직된 스탠스에서 벗어나 현 정권의 요구에 사안별로 연대 내지는 협조하는 쪽으로 대권 전략의 좌표를 서서히 옮기고 있다. 이런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 변화 움직임에는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이 대통령 발목잡기로 더 이상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론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박 전 대표의 취약점으로 지적돼 온 콘텐츠 부족을 털어내기 위해 적극적인 대안제시형 지도자로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여권 일각에서 박 전 대표 측이 대북특사를 적극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외부적으로는 이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행진이 내년 지방선거에까지 이어져 의외로 여권이 선전할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는 그동안 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따른 반사이익을 취해왔던 대권 전략도 수정돼야 함을 의미한다.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 수정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보일 듯 말 듯’한 행보로 ‘대세론 견제’의 화살을 교묘하게 피해왔다. 이런 불가근불가원 전략은 내년 지방선거 이후 박 전 대표가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기본적으로 계속 유지될 스탠스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적극 협조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거리를 두는, 이런 차별화 전략은 그동안 박 전 대표의 지지율 아성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여기에 이 대통령에게 핍박받는 2인자의 이미지까지 겹쳐지면서 중도성향 지지자들의 동정표도 지지율에 포개지기도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 협조 이후 그를 둘러싼 호조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박 전 대표가 핍박받는 이미지에서 중대한 사안에서 이 대통령과 협조하는 ‘장외 권력자’로 변신하면서 그에게 여당 내 야당 목소리를 기대하던 중도성향 지지자들도 떠나가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최근 들어 ‘정치’에 올인하면서 인위적으로 대권 구도를 재정립하고 있지만 박 전 대표가 과연 그것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친박 진영에서도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표를 장외에서 오랫동안 보좌해온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금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정국을 적극 주도할 경우 박근혜 전 대표가 그와 동격 내지는 한 단계 높은 ‘대안’이라기보다 한 수 아래의 ‘후계자’ 이미지가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가 지금처럼 뒤에 앉아서 패를 볼 것이 아니라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당기고 앉아 이 대통령과 다른 대권주자들의 패를 적극적으로 보며 대응해야 한다”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최근 이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3각 대권 경쟁구도에 박 전 대표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리딩 주자로서의 위상과 잠재력을 과시해 선취권을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취권을 쥐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안티 이명박’이 아니라 ‘박근혜 브랜드’로 자립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친박 진영에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정권 출범 뒤 국민들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만한 대표적인 브랜드가 없다는 점이다. 친박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대권 레이스는 새로 시작된다.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이렇다 할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정운찬-정몽준 주자는 박 전 대표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선한 인물이다. 그들보다 박 전 대표가 수구나 올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각 경쟁 체제 초기에 두 주자의 조기 부상을 적극 저지하고 자신의 브랜드를 확실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대북특사 같은 ‘북한 문제 해결사’를 박 전 대표의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것이다. 그는 현역 정치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면담을 한 경험이 있다. 이런 장점을 앞으로 확실하게 살려나가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기회가 올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지율 상승을 계속 이어가는 것도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을 수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직 지방선거(2010년 6월 2일 실시 예정)가 9개월여 남아 있어 많은 변수가 있지만 이 대통령의 정국 주도가 그때까지 이어질 경우 여권이 지방선거에서 선전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어도 참패만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 대통령에 대한 간접 지지로 이어져 그의 레임덕 시기는 더 늦춰질 수 있다. 과거 대권주자들이 너무 성급하게 현직 대통령에 대들었다가 판을 그르친 경우가 있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현재의 대권주자들과 이 대통령의 밀월관계가 지방선거 이후까지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사실 그간 친박 진영에서는 “박 전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 참패를 전제로 국정 전면에 뛰어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지방선거라는 ‘중간평가’를 무사히 통과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박 전 대표의 스탠스가 애매해진다. 박 전 대표가 차기를 준비하기 위해 ‘잘 하고’ 있는 이 대통령을 무턱대고 공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사안별 연대로 이 대통령과 계속 협조 모드를 유지하자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런 협조 모드는 박 전 대표에게 양날의 칼과 같다. 지금까지 그 어떤 2인자도 앞선 정권의 비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경우는 없다. 하다못해 노무현 정권도 대북송금 특검을 통해 김대중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박 전 대표가 향후 계속 이 대통령과 연대 모드를 취한다면 결국 박근혜 전 대표는 이명박 정권 2기의 대표주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이는 박 전 대표에게 ‘안주하려다 낙마하게 되는’ 최악의 경우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전략으로도 인식된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와 이 대통령의 ‘밀월 관계’는 얼마나 지속되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시점에서 그것이 깨지느냐가 중요하다.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을 버릴 시점은 이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모두 소진될 때다. 지금은 이 대통령이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 등과 같은 큰 정치이슈들을 주도하고 있지만 갈수록 그 힘은 빠질 것이다. 지방선거 이후 친이 그룹의 부패 스캔들 등이 터지게 되면 이 대통령의 장악력도 약해진다. 그때까지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에 적당히 협조를 하면서 ‘낚시하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친박 진영에서는 “박 전 대표가 중도층을 잡는 데도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는 최근 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모든 역량을 중도노선 선점에 쏟아 붓고 있는 것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친박 진영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중도노선 선점을 치고 나왔지만 그 세계는 넓다고 봐야 한다. 이 대통령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는 친이 세력과 민주당 이탈자 등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리고 무연고 지역인 호남 지역에 대해서도 전략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이는 이 대통령의 중도노선 강화와 또 다른 의미의 접근이다. 향후 전개될 정계개편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최근 조성된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간의 밀월 관계는 대권 주자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경쟁 체제 구축과 사안별 협조를 통한 리딩 후보 지위의 안정적 확보라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공동 행보는 세종시법 개정,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 등의 돌부리 앞에서 언제든 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시적일 뿐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대북특사 제안설 솔솔
이명박-박근혜 40분 밀담의 비밀
지난 16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간의 ‘청와대 43분 밀담’을 두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올해 초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와 청와대 회동을 가질 때 창가로 그를 잠시 불러 유럽특사를 제의했다. 이때 두 사람은 단 2~3분간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정치권에서는 “43분이라는 긴 물리적 시간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이 ‘정치’란 단어에서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의제에 올린 것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박 전 대표는 청와대 회동에 대해 “개헌 이야기는 안 했다. 남북문제, 4대강 사업, 내년 G20 정상회의 문제 등 그런 계통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이 대통령이 단독회동의 자리를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 아직 양측의 밀담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개된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친이 진영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최근 ‘앞으로 통일정국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회동 때도 박 전 대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경력을 배경으로 그에게 대북특사를 제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 박 전 대표도 현 정권 출범 뒤 특별히 내세울 역할이 없었다는 점에서 대북특사라는 역할에 욕심을 내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또한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 대통령은 현재 3명의 대권 주자를 경쟁 체제로 몰아넣고 있다. 정몽준 대표에게는 재보선 승리와 당내 친이-친박 갈등 해소 등의 미션을,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게는 현 정권의 중도노선을 견인해 지지층을 넓히라는 미션을, 박 전 대표에게는 남북문제와 관련해 대북특사의 미션을 주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전략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그동안의 ‘구원’을 깨끗이 씻고 박 전 대표에게 ‘공정한 대권 관리’를 약속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밝혔다. “박근혜는 절대 대권 후보로 안 된다”는 친이 그룹의 비토 분위기를 희석시키고 적어도 “박 전 대표의 대권 행보를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시그널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세종시법 개정과 선거구제 개편 등에 있어서 일정한 협력을 요구했다는 ‘빅딜설’도 회자되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