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드러운 생크림을 끼얹은 듯한 달콤한 겨울. 월정사 9층석탑 위에 눈이 내려앉았다. | ||
깊어 가는 겨울, 눈을 찾아 강원도 평창 땅을 밟았다. ‘happy 700’ 쾌적한 고원의 땅, 평창은 국내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영서내륙을 대표하는 지역이다. 서풍에 실려온 구름이 태백준령에 부딪치며 쏟아져 내리는 눈이라 그만큼 내릴 가능성도 높고, 양도 많다.
칙칙한 잿빛 도시에서 눈(目) 빠지게 눈(雪)을 기다리고 있다면 주저말고 설국 평창을 찾아라. 구름만 스쳐가도 산자락 가지마다 새하얀 눈꽃이 핀다는 평창엔 눈 속에 파묻힌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풍족하다.
늦은 밤부터 태백준령의 봉우리들은 짙은 눈구름에 휩싸였다. 별 하나 없이 까맸던 밤하늘 때문이었을까. 밤새 지치지도 않고 많은 눈이 내렸다. ‘접경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소설 <설국> 중에서)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처럼, 밤의 터널을 지나온 평창 땅은 순백의 설국이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불분명했고, 집과 집 사이를 경계짓는 일조차 부질없어 보였다. 눈은 무릎을 지나 허벅지께서 편평한 설평선(雪平線)을 이뤘고, 하루 종일 솜털처럼 하얗게 내려앉아 세상을 덮었다.
▲ 요사채 지붕 위에도 하얀 눈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 ||
허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설국이 코앞인데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다른 곳을 다 양보하고, 일반인들에게도 눈길 속에서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눈 여행 코스인 월정사와 대관령 양떼목장으로 길을 잡았다.
신라 선덕왕 때 세워진 고찰, 오대산 월정사부터 찾았다. 안개처럼 희뿌연 눈보라 속에서 새하얀 길은 마법처럼 설국을 향해 뻗어 있었다. 눈은 바람의 결을 따라 춤추며 땅으로 내렸고, 눈꽃은 창공을 박차고 치솟은 상록수림 위에서 활짝 폈다.
가끔 제 무게에 겨운 눈들이 나무에서 땅으로 툭툭 쏟아져 내릴 뿐, 사위는 적막했다.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조금씩 더 깊어지고 좀 더 밝게 빛나는 눈밭. 오대산 너른 품속에 들어앉은 절집은 그렇게 깊고 적막한 겨울 속에 취해 있었다. 매표소에서부터 10여 분 걸었을까. 월정사 기행의 첫 관문인 일주문이 나타난다. 흰눈을 소담히 이고 앉은 일주문 뒤로는 몽환처럼 하얀 사색의 숲길이 열려 있었다. 산문으로 가는 1km 전나무 숲길은 꿈길 같은 풍경으로 다가섰다.
무릎 위까지 차 오른 눈밭이며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낸 하얀 길, 풍성하게 핀 눈꽃, 그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전나무의 초록 속살…. 수령 사오백 년 된 전나무들이 하얗게 늘어선 숲길은 상상하던 설국의 풍경 그대로다. 댕그랑거리는 풍경 소리가 운치를 더하는 산문의 길이기에, 월정사의 숲길은 더 황홀했는지도 모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숲길을 지나 절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음엔 어느새 청아한 풍경소리가 담겼다. 깊은 정적에 잠긴 절 마당엔 눈 속에 파묻힌 팔각구층석탑과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석조보살상뿐, 인적마저 드물다.
5백 년을 한결같이 푸르렀을 전나무 숲길과 함께 월정사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팔각구층석탑은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다각다층석탑. 지붕은 추녀 끝마다 풍경을 달고 은색의 눈바람에 흔들어 고운 풍경소리를 한아름씩 쏟아냈다. 세속의 겨운 짐이 씻겨가기라도 한 듯 마음에는 어느덧 평안이 깃들었다.
눈 속에 묻혀서도 점잖게 웃고 있었던 보살상. 그 넉넉함에 절로 마주 합장하게 된다. 그리고 소원했다. 경건하게 합창한 손끝에도 부처의 자비처럼 따뜻한 솜눈이 내려앉는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눈꽃 여행. 허나, 뭔가 2%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국내 문수신앙의 중심지 상원사를 욕심내라.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8.5km의 비포장 산길을 걸어 오른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충분하다. 봉긋봉긋한 오대산의 산마루와 능선을 뒤덮은 눈밭이 상원사에선 발 아래. 그만큼 전망 또한 더없이 호쾌하다.
다음 목적지는 대관령 양떼목장이었다. 횡계∼강릉 방향 456번 지방도로를 타고 30여 분을 달리면 나타나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상행선 휴게소. 거대한 풍력기 앞, 선자령과 양떼목장 갈림길에서 좌회전해 양떼목장으로 들어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밭을 따라 걷기를 10여 분. 하얀 구릉과 잿빛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한 하늘이 부드러운 능선으로 나타났다. 막힘 없이 트인 시야, 뻥 뚫린 그 시선엔 흰 눈에 뒤덮인 구릉들만 가득했다. 목장의 규모는 대략 6만2천 평. 소를 키우는 대단위 목장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지만, 양 2백여 마리를 사육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지난해 새로 만들어진 ‘건초 주기 체험장’(입장료 2천5백원). 볏짚으로 따뜻하게 채위진 내부엔 양 1백여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먼저 찾은 사람들이 먹이를 주고 있었다. 즐거움에 겨운 꼬마들의 함성과 건초를 졸라대는 양들의 울음소리…. 체험장은 눈밭의 적요를 깨는 유일한 곳이다.
▲ (시계방향으로) 대관령 양떼 목장. 양들은 북실북실한 털옷을 입고 눈밭을 잘도 뒹군다. 양떼에게 건초를 주는 모습. 월정사 숲길 | ||
목장은 이국의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엽서처럼 고왔다.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행복도 있었다. 비닐포대로 썰매를 타는 흥겨움. 차도 힘들고, 사람도 힘들었지만 양떼목장은 눈에 목말랐던 도시의 나그네에게 선물처럼 반가운 고향이었다.
여행 Tip ‘눈길은 느긋하게’
▲교통: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장평~진부~속사~유천~횡계~대관령으로 이어지는 길 주변이 온통 하얗다. 월정사는 진부IC 이용, 강릉 방향 6번 국도를 탄 뒤 간평교 삼거리에서 446번 지방도로를 타면 되고, 대관령 양떼목장은 횡계IC로 나와 옛 도로인 456번 지방도로를 타고 강릉 방향으로 5km쯤 간다. 눈이 내린 뒤라면 옛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휴게소에 주차한 뒤,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휴게소 뒷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월정사에서 양떼목장으로 가는 길은 강릉 방향 456번 지방도로만 내처 타면 되는데, 횡계읍쯤에서 대관령 옛길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한다. 사륜구동 차량으로는 휴게소에서 양떼목장까지 진입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숙식: 발왕산 기슭 용평리조트(033-335-5757)와 월정사 입구 오대산호텔(330-5000)이 큰 숙소고, 횡계읍내에 중소 규모 숙박시설이 많다. 대관령 가는 길(336-8169), 황토빌(336-2900), 한니발통나무별장(336-3535), 리멤버(335-4399) 같은 펜션이 즐비하다.
▲맛집: 오대산 월정사 입구는 산채정식이 별미. 오대산식당(033-332-6888), 경남식당(332-6587), 비로봉식당(332-6597), 오대산산채일번가(333-4604) 등이 있다. 횡계리 일대에선 황태가 겨울 진미. 읍내에 황태회관(335-5795), 황태덕장(구 송천회관 335-5942) 등이 유명하다. 대관령 별미인 오삼불고기의 원조 납작식당(335-5477), 진부읍의 부일식당(033-335-7232) 산채백반도 명성이 있다.
겨울산 요령
접근이 아무리 용이하다 하더라도 눈길은 눈길이다. 한 번 내리면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적설량이 많으므로 아이젠과 스패츠는 필수. 스틱(지팡이)까지 준비한다면 금상첨화다. 아이젠은 초보자의 경우 4발짜리, 착용이 간편한 것이 좋다. 나선 길에 상원사와 선자령 트레킹까지 해보겠다면 평소보다 시간이 배 이상 소요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것. 오후 4시 이전 하산하도록 일정을 짜야 한다. 자동차의 스노우 체인은 끊어질 때를 대비해 한 벌 더 준비하는 것이 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