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8 재보선 수원 장안구의 승리자는 손학규 전 대표였다. 민주당 이찬열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지지자들이 손 전 대표에게 환호를 보내며 축하해 주고 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선거 다음날인 10월 29일 새벽,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이찬열 당선자와 함께 지역의 한 교회를 찾아 예배를 올렸다. 선거운동 기간에도 하루를 새벽기도로 시작했던 그다. 손 전 대표는 교회를 나오면서 이 당선자에게 “오늘 춘천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손 전 대표가 이날 홀가분하게 춘천행 자동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건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재보선에 출마해달라는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만 해도 당 안팎에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 “정세균 대표를 도와주기 싫다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손 전 대표는 “내가 당선되는 건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다”며 여당 후보에게 20%나 뒤지는 무명의 정치신인이자 대리인을 내세워 승산 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내 정치적 감에 비춰볼 때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며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살인적 일정을 감내해야 했다. 수원 천천동에 아예 월세 아파트를 얻어 선거에 ‘올인’했다. 매일 장안구 내 교회를 찾아다니며 새벽기도로 아침을 열었고 자정이 될 때까지 골목길을 누볐다. 하루 수면시간은 고작 3시간 정도, 어느새 목소리는 쇳소리로 변했다. 또 입술은 부르터 올라 딱지가 앉아 있었다. 측근들조차 혀를 내두른 28박 29일 간의 강행군이었다.
한 측근은 “출마 요구를 거절한 데 따른 서운함 때문이었는지 선거 초반만 해도 당 차원의 지원이 별로 없었다”며 “지도부와 의원들의 왕래가 부쩍 는 것도 선거 막판 추격전이 본격화되면서부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도박’은 성공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당선시키는 능력을 갖춘’, 야권 내 유일한 인물로 부상했다. 그를 재보선의 주인공으로 평가하고, ‘민주당의 박근혜’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컨설팅본부장은 “야권 내에서 누군가를 대신 세워 당선시켜줄 능력을 갖춘 사람은 현재로선 손 전 대표뿐”이라며 “정동영 의원이 지난 4월 재보선에서 신건 의원을 동반 당선시켰지만 ‘호남’이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었던 점에 비춰보면 이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손 전 대표는 이번 승리로 많은 ‘전리품’을 챙겼다. 우선, ‘수도권 불패신화’를 이어가며 ‘수도권 맹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했다. 그는 지난 4월 재보선에서도 인천 부평을과 경기 시흥시장 선거전을 도와 승리를 일군 바 있다. 이 같은 ‘수도권 득표력’은 그를 민주당의 다른 주자들과 차별화하는 핵심경쟁력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권의 주요 근거지인 수도권에 파열구를 뚫은 셈”이라며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외연을 수도권으로 확장했다”고 말했다.
또 1년여 간의 정치 공백을 말끔히 메워 ‘정치적 휴지기’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 정치인으로도 우뚝 섰다. 그가 선거 직후 곧바로 중앙무대를 떠났음에도 주변의 우려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이유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화려한 휴가를 보낼 것”(민주당 재선의원)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원칙을 지키면서 자기 책임은 다 하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도 심었다. 그는 장안 출마를 요청하는 지도부에 “손학규가 장안에 나가는 것은 당에 도움이 안 된다. 또 종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지역민들과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당에 선거 승리를 안겼다.
이는 특히 정동영 의원의 처신과 확연히 구분되는 대목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당내에서 쉬운 길을 찾아가 당에 부담을 안긴 정 의원과 일부러 험로를 택해 승리를 안겨준 손 전 대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출신성분’을 ‘세탁’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천형과도 같았다. 지난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전신) 경선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도 바로 이 ‘서자 콤플렉스’였다. 정치컨설팅사 포스커뮤니케이션의 이경헌 대표는 “이력논란은 손 전 대표의 최대 약점 중 하나”라며 “그러나 민주당에 연이은 승리를 안기면서 그의 출신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운 지경이 됐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역학구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정세균 대표 역시 이번 재보선을 통해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하며 차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성공했지만, 손 전 대표와의 권력 분점은 어쩔 수 없이 각오해야 한다는 평가다. 이경헌 대표는 “지방선거를 수개월 앞두고 대중적 정치력을 확인했다는 것은 공식적인 정치복귀 시기와 상관없이 ‘막후의 리더십’을 확보했다는 의미”라며 “이미 민주당의 리더십은 ‘정·손’ 두 사람으로 이원화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민주당 지도부로서는 당장 손 전 대표를 제외하고는 내년 지방선거 전략을 짤 수가 없게 됐다. 수도권 출마를 원하는 당내 후보들은 손 전 대표에게 의지하게 될 게 뻔해 권력의 중심도 자연히 뒤따를 것이란 분석이다. 손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지방선거가 가까워올수록 당내에서도 손 전 대표를 불러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손 전 대표는 여전히 신중한 모습이다. 선거기간 동안 정치활동 재개 시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줄곧 “아직 반성이 끝나지 않았다. 쉬엄쉬엄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와 가까운 민주당의 한 의원은 “손 전 대표가 본인의 고민을 잘 얘기하지도 않고, 또 친한 의원들의 조언에도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라며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손 전 대표가 “기존 여의도 정치에 상당한 환멸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며 “그래서인지 정치권 인사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손 전 대표 주변에 따르면 그의 고민이 결국 ‘어떤 정치를 할 것이냐’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를 끝내기 전까진 그의 ‘잠행’도 계속될 것이란 얘기다.
또 다른 한 측근은 “당에 돌아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또 민주당이 어떻게 해야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올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면서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의외로 짧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웃음꽃 핀 정세균 대표
큰산은 넘었는데...
정 대표 정치인생 중 이날만큼 기분 좋은 순간이 있었을까. 사실상 이번 재보선은 그의 대표 취임 이후 ‘거함’ 한나라당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나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를 넘고, 당 지지율에서도 한나라당에 10%포인트 이상 밀리는 가운데서 일궈낸 승리라는 점은 이날 그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와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따른 의원직 사퇴 등 한동안 가시밭길만 걸어야했던 그는 이날만큼은 ‘미스터 스마일’이란 별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번 승리로 그의 위상은 한껏 고조됐다. 당장 비주류 진영의 조기전당대회 압박은 물밑으로 가라앉게 됐다. 사실상 내년 지방선거까지 리더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야권 통합·연대과정에서도 민주당 중심의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키를 쥐게 됐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유효 판결은 또 다른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강공을 택할지를 놓고 그는 또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비주류 측 한 의원은 “정 대표가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전국에 걸쳐 꾸준히 자기 조직을 다져놨다고 들었다”며 “이번 선거 승리로 ‘정세균 체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어 더욱 공고해졌다”고 말했다.
졌지만 이긴 친노그룹
여당 텃밭서 희망 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