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다연발성 악재는 각각의 사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상호 연결성을 가진 하나의 커다란 블랙홀이다. 이에 친이그룹 일각에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정면 돌파를 시도해 난마처럼 얽인 현안들을 일거에 풀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특히 세종시 문제는 현 정권의 정책 추진력과 친박세력과의 권력 구도를 가늠해볼 바로미터라는 점에서 여권 주류가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친이그룹 일각에서는 ‘대통령 선 사과-국민투표 제안’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여타의 악재들까지 한꺼번에 돌파해보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고 있는 이 대통령의 탈출 루트는 무엇인지 따라가 봤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 더블딥을 맞기 전에 정치 더블딥에 먼저 빠져버렸다.”
10월 재·보궐 선거가 끝나자 여권에서 터져 나오는, 이명박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심각한’ 농담이다. ‘더블딥’이란 경제용어로서 경기침체 후 잠시 회복기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침체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현재의 이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경제 더블딥 상황과 유사한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어 여권 내부에도 비상이 걸리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촛불정국으로 심각한 ‘침체’를 거친 뒤 올해 중반 정운찬 총리 영입 효과와 친 서민 중도실용 정책 추진 등으로 지지율에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하고 세종시 문제와 미디어법의 헌법재판소 판결 후유증이 겹치면서 또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침체 현상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 여권 일각에서 제기하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이중침체’ 조짐의 심각성은 다시 정국을 반등시킬 추동력이 이전 침체기에 비해 갈수록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이는 곧 만성 침체 상황으로 이어져 이명박 대통령을 조기 레임덕 국면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 대통령은 트리플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우선 ‘혹시나’ 하며 기대했던 재·보궐 선거에 패배하면서 그 후유증이 정국 장악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역대 재보선이 여당의 무덤이었다는 점에서 2승 3패라면 절반의 성공으로 봐야 한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본질’을 망각하고 ‘현상’에만 주목하는, ‘견강부회’라는 게 당내외의 대체적 지적이다.
수도권 재보선의 경우 6시를 넘어서면서부터 퇴근하는 직장인들의 투표 참여가 부쩍 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현 정권의 일방주의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한 부동층과 젊은층의 ‘적극 참여성’ 투표였다는 점에서 내년 지방선거의 결과를 미리 엿보게 한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에 대한 착시현상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이번 선거도 기대를 했는데 역시 여론조사는 일종의 환각제였던 것 같다. 여당이나 청와대 모두 ‘지지율 고공행진’에 대한 대단한 착각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런 재·보궐 선거 패배의 후유증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정몽준 대표 체제를 더욱 곤궁으로 몰아넣고 있다. 정 대표는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당 내외로부터 “너무 뻣뻣하다”라는 비판을 받아 불신을 자초했다. 정 대표 곁에서 재·보궐 선거를 치른 한 의원은 “말(연설)을 못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에 아직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더라. 그에게 악수를 받는 지역주민들도 어정쩡하게 대해 참 안타까웠다”라고 말했다. 정 대표에 대한 ‘리더십 불신’은 곧 청와대의 ‘여의도 돌보기’ 부담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에게도 악재다. 특히 ‘허약한’ 정 대표가 향후 세종시 문제와 미디어법 판결 정국 등의 대사를 잘 처리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정 대표 체제가 불안해지면서 당내 권력 갈등도 재연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민본21’을 비롯한 당내 소장파 그룹은 대대적인 쇄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내년 조기전대를 개최한다고 하더라도 박근혜 전 대표나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모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떨어진다. 이런 애매한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정 대표가 ‘식물 대표’로 전락하게 되고 청와대의 리모컨에 의해 여당이 원격조종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국정 운영의 부담을 이 대통령 스스로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 위부터 세종시 원안 사수대회, 논란을 일으킨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지도부가 재보선 패배 등으로 난감해하는 모습. 이종현·임영무 기자 | ||
사실 친이그룹은 세종시 문제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의외로 강하게 치고나오면서 승부수를 던지자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했다. “이제 세종시 원안 수정은 물 건너갔다”라는 말들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번 해보자”라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정운찬 총리와 진수희 의원 등이 잇따라 나서서 이 대통령을 ‘백업’했다. 이런 친이그룹의 강공 배경에는 국민 여론이 원안 수정에 대해 호의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숨어 있다. 실제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 전 대표의 ‘원안 플러스 알파’ 발언에 대해 58%가 찬성을 했지만, 세종시 수정안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38%)보다 찬성(40%)이 더 많았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원칙론에는 동의하지만 이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 제안도 일리가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친이그룹은 여론의 이런 ‘이중적’ 태도에 주목하고 있다. 향후 세종시 문제에 대해 ‘선전전’을 강화하면 여론도 수정안에 대해 찬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 실제 여권 주류 측이 세종시 문제에 대한 여러 대책 중 하나로 ‘대통령 선 사과-국민투표 전격 제안’이란 강경책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당의 한 핵심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원안 고수 발언은 지난번 미디어법 처리 정국 때처럼 ‘발끈 정치’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약속을 함부로 뭉갠다고 여기고 발끈하면서 던진 발언에 불과하다. 원칙 고수도 중요하지만 국가 백년대계 차원에서 봐야 한다”라고 전제하면서 “앞으로 이 문제는 이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에 대해 사과하고 그 뒤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책 사업을 두고 친이-친박 간의 갈등만 커져 국가 정책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추진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세종시 문제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이 대통령과 언제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국민투표 제안은 여권 주류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부치는 순간 그는 생과 사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집권 중반기에 특정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부치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이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성격이 강해진다. 만약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부터 이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국민투표는 그 자체로 이 대통령에게는 몸에 두르는 폭탄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 일각에서는 ‘페인트 모션만 취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어차피 세종시 문제는 찬반이 반반 정도지만 향후 친이-친박의 ‘여론몰이 작업’ 정도에 따라 무게추의 기울기가 한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 여권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국민투표 제안은 여론 조성을 위한 일종의 사전 정지작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 대통령이 국민투표 제안을 언급할 정도가 되면 국민들도 ‘대통령이 목숨을 내놓고 그렇게 제안을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여론이 박 전 대표를 계속 압박한다면 그도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과정을 거쳐 양쪽이 수정을 전제로 한 절충안을 도출해낸다면 그것으로 최선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보궐 선거를 전후로 이 대통령이 정치적 ‘더블딥’에 서서히 빠지고 있다는 시그널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이에 친이그룹은 여러 가지 악재들을 ‘한방’에 해결해줄 여의도판 ‘그랜드 바겐’으로 국민투표 제안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재보선 뒤의 민심이 달궈진 냄비가 식는 것처럼 급격하게 이 대통령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대통령은 국민투표 제안으로 더블딥 탈출 루트를 찾을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