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앞으로 6개월이 민주당과 ‘정치인 정세균’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지방선거까지 7개월이 남아 있는데 앞으로 6개월 동안 ‘한나라당 이명박 정권과 민주당·정세균’이 진검승부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민주당과 정세균이 과감하게 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노트북에 정 대표의 말을 받아치던 기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 대표의 달라진 화법 때문이었다. 자신을 ‘저’가 아닌, “정세균”으로 ‘객관화’해 불렀고, 당명과 자기 이름을 나란히 하기도 했다. 모두발언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들의 첫 질문도 “‘정세균’이란 이름을 수차례 직접 언급했는데, 그게 어떤 의미냐?”였을 정도였다.
정 대표는 답했다. “원래 저는 ‘선당후사’(先黨後私)를 실천하는 것이 당 대표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 대표가 변화의 주도자가 돼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됐고, 그래서 더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이름을 부름으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정 대표 스스로 변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이날 간담회 이후 전 위원장과 노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정 대표의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날처럼 정 대표가 ‘화두’를 던지고, 핵심측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피알(PR)하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정세균’이라는 브랜드로 ‘장사’를 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치밀하게 기획된 흔적도 역력했다. 이들 측근은 당의 변화를 주도하겠다는 정 대표의 선언을 “정세균 독트린”이라고 명명했다. 특히 전 위원장은 재보선 직후 정 대표에게 “아무 입장표명도 없이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승리의 의미를 직접 국민 앞에 정리하고, 당의 목표와 리더십·정책을 분명히 공표함으로써 수권정당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며 선언문 작성을 제언했다. 간담회 전날인 31일 핵심당직자들이 모두 당사에 출근해 선언문을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당 안팎에서도 ‘정세균의 변신’을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일단은 재보선 승리로 한껏 고무된 데 따른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재보선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50%를 넘나들고,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정몽준 대표가 한나라당 선거전을 지휘한 상황에서 거둔 승리였다”며 “‘자가발전’하더라도 미움을 사지 않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느닷없이 당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던 것. “민주정부 10년의 정체성에만 매달리지 않고 좌우를 뛰어넘겠으며, 서민·중산층에 도움이 된다면 심지어 우측의 정책도 취할 것”이라는 정 대표 발언이 불씨가 됐다. 또 “창의적 변화” “과감한 변화” 등 ‘내용 없는’ 말의 성찬도 논란을 부추겼다.
당장 당내 비주류·진보 진영은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당을 오른쪽으로 몰고 가려는 속셈”이라며 반발했다. 비주류 측 핵심인 문학진 의원은 “야당 안 하겠다는 얘기”라고 발끈했다.
계파 수장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재야파를 이끄는 김근태 전 의원은 지난 11월 3일 전남대 특강에서 “(민주당은) 투쟁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제3의 길을 주창했던) 블레어 식이 아니라 오바마 식으로 개혁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정배 의원도 이틀 뒤인 5일 영남대 강연에서 “말로만 막고 말로만 싸우겠다고 해서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구체적인 정책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다분히 정 대표를 겨냥한 쓴소리였다.
이들은 재보선 승리도 달리 해석했다. 김 전 의원은 “민주당의 온전한 승리가 아니었다”고 했고, 천 의원도 “한나라당에 지지율이 뒤지고 있음에도 수도권 전승을 이뤘다는 것은 (민심이) ‘민주당 지지’가 아니라 한나라당에 경고하겠다는 것”이라고 ‘보수적’으로 평가했다.
정 대표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는 11월 4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민주당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다면 ‘중도 진보’”라며 “김대중·노무현 두 분 대통령을 발전적, 창조적으로 승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 대표는 “시대가 바뀌고 정치상황이 바뀌면서 조정과 변화는 필요하다. 정체성을 지키되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은 유연하게 끌고 갈 것”이라며 비주류 반발에도 ‘정세균 독트린’은 유지될 것임을 천명했다.
정 대표 발언을 둘러싼 이번 논란의 본질은 사실 ‘정체성’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당 안팎의 지적이다. 민주당에도 차기 대선주자 경쟁의 시동이 걸렸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재보선 패배 시 ‘조기전당대회 카드’로 정 대표 리더십을 흔들 생각이었던 비주류 측이 선거 승리 후 정체성 논란으로 방향을 튼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정 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비주류 측은 이번 재보선을 손학규 전 대표와 친노무현 그룹 등 제 세력의 공동승리로 평가하려는 경향”이라며 “정 대표 독주를 견제하겠다는 속셈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정 대표도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심산이다. 그는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신중하고 점잖은 이미지보다 과감히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비주류의 공격에 적극 대응할 뜻을 내비쳤다. 정 대표 측 한 핵심관계자는 “선거 이후 대표 스스로 기존 ‘관리형 리더십’을 탈피해야겠다는 각성이 있었다”며 “어수선했던 당 사정도 많이 좋아진 만큼 이제부터 ‘정세균식 정치’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재보선을 통해 정 대표의 ‘고질’인 ‘낮은 대중성과 인지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졌다는 전언이다. 또 다른 한 측근은 “정 대표가 유세를 다니면서 ‘지난 4월과 이번 선거에서 (나에 대한) 유권자들 반응이 크게 달라졌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며 “실제로도 정 대표가 유세장에 등장하느냐 여부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크게 달라서 ‘한 번 더 유세를 와 달라’는 요청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11월 4일 재보선 당선자들과 함께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예방했다. 앞서 3일에는 봉하마을로 내려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민주진영 ‘적자’ 행보를 본격화한 것이다.
또 해외로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11월 12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을 만나고, 올해 안에 중국과 미국도 차례로 찾아 제1야당 지도자로서 위상을 굳힌다는 복안도 세웠다.
정치컨설팅사 포스커뮤니케이션의 이경헌 대표는 “세종시와 미디어법, 4대강 등 굵직한 연말 이슈들이 줄줄이 대기 중인 상황에서 종전의 불안정한 리더십으론 효과적인 대여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본인의 색깔을 강화해 정국 상황을 돌파한 뒤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